♧ 지네
아파보니 알겠습니다
피의 무게를
어쩌다 다리와 늑골 부러져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새로 나온 시집도
절뚝이며 방 한쪽에
다리가 묶여 있습니다
어머니가 과일이며 사골국이며
뼈에 좋다는 음식을
침대까지 가져다 주십니다
나는 일도 못하고
갓 태어난 아이처럼 탯줄 붙잡고
한동안 노모에게 매달려 살았습니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살림을 놓으셨던 당신
제비새끼처럼 입만 성한 딸에게
다시 젖이 도는 젊은 어미 되어
발이 여럿 달린 벌레가 되어
나에게 종일 먹이를 물어다 주십니다
어머니가
물 묻은 찬 손으로
내 이마를 짚어주면
내 흰 늑골에
실지렁이 같은 핏기가 돌았습니다
♧ 흑해에서 온 사람
아버지의 통증은 틀린 곳이 없다
아픈 사람을 생각하면
발뒤꿈치까지 춥다
아버지는 추운 짐승들의 집
흑해에서 온 사람
나는 약사여래불처럼
알약 같은 이스라지 흰꽃
등으로 다 피운다
손으로 얼굴을 감싸면
아버지의 통증이 만져진다
등 뒤가 괴괴하다
뒤돌아보면 측백나무 끌고
흑해를 건너는 아버지
♧ 운문적 인간
내 별을 훔쳐간다
문장이 캄캄하다
반(反) 태양 경배 자세는
태양을 잠그는 일
백 년 동안 울었던 귀를 씻고
일만팔천 신을 허리로 영접하는 일
정살지신*에게 절하고
초근목피하면
머리 검은 짐승은 식물처럼 고요해지지
운문적 인간은 현묘하여
열두 개의 감정을 죽여도 죽지 않고
사람과 개를 버리지 못한다
한 번 더
행간을 열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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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살지신 : 제주 사람들이 모시는 집안을 드나드는 출입구의 신.
*서안나 시집 『애월』 (시인수첩 시인선 079,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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