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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7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4. 7. 15.

 

 

흥수아이* - 이규홍

 

 

잘 생긴 다섯 살

흠 없는 어린 아이

 

누군가 그를 지목하였을 것이다

계속되는 천재지변에

천지신명께 바칠

살아 있는 제물

아이 아버지 어머니도

어쩔 수 없었다

하늘만 원망할 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찬 서리 맞아 곱게 핀

국화 꽃잎 따다

아이 몸에 뿌리고

고운 흙으로 덮었다

아가야, 아가야

수만 년 지나

좋은 시절 만나거든

다시 눈을 뜨거라

벌떡 일어나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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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수아이 : 문의면 두루봉동굴에서 발견된 기원전 4만년 구석기 시대 다섯 살로 추정

되는 어린 아이로 최초 발견자 김흥수의 이름을 따서 흥수아이로 부른다.

 

 


 

석가헌夕佳軒 - 이 산

 

 

태양의 기울기가 급해지는 때

고택古宅에 낯선 시간이 찾아왔다

 

담 너머 솔바람이 뺨을 스치고

조금은 부족한 술기운이

작약꽃 향기로 물들어 갈 때

 

몸을 뒤틀며 애써 숨죽이던

향피리 소리 날아오르자

멀리 아프리카의 밸러폰balafon에 실려 온

소프라노 소리가 참 맑다

 

이미 감동하기로 마음먹은 사람들은

공정하게 파고드는 입체 선율을 따라

성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절대 순백의 여유, 관대함으로

자신만의 석가헌夕佳軒을 짓고 있다

 

노을빛은 더 곱다

 

 


 

공놀이 - 이영란

 

 

산책로 담장 너머로 공이 떨어진다

 

벤치 옆 꽃사과 잎이 흔들리고

 

지나가던 노인, 공을 주워 던진다

 

담장에 걸린 아이들 얼굴이 붉다

 

공이 넘어가지 않는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가 기침을 한다

 

아이들 목덜미는 한 뼘 더 늘어지고

 

공을 잡은 노인,

 

허리를 길게 뻗는다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다

 

보도블록은 얼마나 더 깊어질까

 

노인이 저만치 굴러간다

 

바닥이 단단해진다

 

늙은 아이들이 따라간다

 

 


 

동종 - 임미리

 

 

종루에 걸리지 못한 채 풍화되고 있다

용뉴의 미르 여의주의 속살을 품어

예사롭지 않은 견고함에 현혹당하는데

과객의 눈길이 시답잖다는 듯 날이 선다

 

연꽃을 둘러싼 당초문 여백 사이로

전이된 생각은 불립문자 꽃잎 틔워

무수한 세월을 돋을새김 하고 있다

 

당목도 없이 쓸쓸히 매달려

문득, 허공을 울리는 속내가 궁금해진다

오랫동안 당좌에 임하지 못하고 참아 낸 시간

무궁무진함으로 경내를 울려도 인내하고 싶어진다

 

내장사 경내를 돌고 도는 바람 한통속이 되어

간절한 기다림의 능선을 넘어서고

마침내 동종의 어깨 곡진하게 두드린다

 

애써 참고 있었던 곡비처럼

울컥 쏟아내는 울림, 깊이가 완성된다

마법이 풀린 당초문 일제히 살아나 꿈틀거리고

피향에 든 연꽃에 취하는 사이

 

미르, 승천의 어귀 가볍게 넘는다

 

 

         *월간 우리7월호(통권 43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