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븐숭이 애기무덤*
꽃 피는 봄이 아닌 꽃이 지는 봄이라니!
동백 숲 어름에서 스러져간 꽃잎, 꽃잎
궂은비 내리는 바다
젖은 가슴 또 젖는다
씨방 한껏 부풀리던 지난 계절 뒤꼍에서
봉오리도 벌기 전에 꺾여버린 여린 꽃대
바람이 바람을 끌고
서우봉을 넘는다
오늘도 저 하늘엔 달과 별 뜨고 지고
기억 잃은 들녘에도 벌 나비 날아든다
여전히 말문을 닫고
쳇바퀴만 도는 해
바닷물도 멍이 드는 그 사월 다시 오면
살 에는 눈보라도 끄느름한 빙점도 뚫고
아이야, 꽃으로 피어라
천년토록 붉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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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 앞에 돌 몇 개로 표시해 놓은 애기무덤이 있다.
♧ 북촌 오돌또기
어디로,
어디로 갔나
쌔고 쌨던 오분자기
참전복만 득시글한 다려도 양식장엔
허기진 불가사리 떼 촉수 세워 몰려든다
굽이치는 물결 앞에 뿌리를 박고 서도
오목가슴 시릴 때면 쓸리고 깎이는 몸
돌빌레 구멍 난 시간 물기 언제 마를까
뫼비우스 띠로 감긴 파도 소리 애달파라
식민의 겨울 딛고 일어선 봄날마저 죽창에 찔리고 쇠창에도 마구 찍혀 땅속으로 꺼졌던가 하늘로 솟았던가, 한라산 꼭대기에 실안개 돈 듯 만 듯 썰물 진 모래톱에 궂은비 온 듯 만 듯 둥그래 당실 둥그래 당실 돌아보면 꿈만 같고 묶지 못한 옷고름같이 두서없는 옛이야기 어디 한번 풀어나 보자
따개비 젖은 울음이 숨은 여에 그득하다
산으로 간 남자들은 이름마저 불에 타고
들에 엎딘 여자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해마다 정월만 되면 넘쳐나는 제삿밥
사라진 발자국들 물속 깊이 잠겼을까
쉼 없는 자맥질에 숨이 가쁜 잠녀 할망
서우봉 넘은 바람이 애기무덤 훑고 간다
감장 못한 주검들이 감저 지슬 키운다는
검은 밭담 둘러쳐진 너븐숭이 옴팡밭엔
빗돌만 외롭게 누워 숨비소리 캐고 있다
♧ 곤을동*을 지나며
정당 대신 쇠사슬이 걸음을 막는 을레
세간붙이 하나 없는 무너진 돌담 안엔
개망초 억새 무리가 주인 행세 하고 있다
장마가 끝났는지 회북천도 말라 있다
야윈 등 드러낸 채 닳아가는 검은 돌들
개울이 바다가 되면 사람들이 돌아올까
물이 사철 고인 땅은 눈물이 많다지만
속으로만 울다 울다 눈물샘이 막힌 마을
냇둑 길 우회로 너머 붉은 해가 저문다
언제나 노을 앞에선 제 키를 낮추는 심
그날의 불길 같은 까치놀이 뜨거워져
별도봉 아랫도리가 파도 소리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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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당시 불타 없어진 제주시 화북동의 잃어버린 마을.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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