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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13)

by 김창집1 2024. 7. 16.

 

 

너븐숭이 애기무덤*

 

 

꽃 피는 봄이 아닌 꽃이 지는 봄이라니!

동백 숲 어름에서 스러져간 꽃잎, 꽃잎

궂은비 내리는 바다

젖은 가슴 또 젖는다

 

씨방 한껏 부풀리던 지난 계절 뒤꼍에서

봉오리도 벌기 전에 꺾여버린 여린 꽃대

바람이 바람을 끌고

서우봉을 넘는다

 

오늘도 저 하늘엔 달과 별 뜨고 지고

기억 잃은 들녘에도 벌 나비 날아든다

여전히 말문을 닫고

쳇바퀴만 도는 해

 

바닷물도 멍이 드는 그 사월 다시 오면

살 에는 눈보라도 끄느름한 빙점도 뚫고

아이야, 꽃으로 피어라

천년토록 붉을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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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너븐숭이 43기념관 앞에 돌 몇 개로 표시해 놓은 애기무덤이 있다.

 

 


 

북촌 오돌또기

 

 

 어디로,

 어디로 갔나

 쌔고 쌨던 오분자기

 참전복만 득시글한 다려도 양식장엔

 허기진 불가사리 떼 촉수 세워 몰려든다

 

 굽이치는 물결 앞에 뿌리를 박고 서도

 오목가슴 시릴 때면 쓸리고 깎이는 몸

 돌빌레 구멍 난 시간 물기 언제 마를까

 

 뫼비우스 띠로 감긴 파도 소리 애달파라

 식민의 겨울 딛고 일어선 봄날마저 죽창에 찔리고 쇠창에도 마구 찍혀 땅속으로 꺼졌던가 하늘로 솟았던가, 한라산 꼭대기에 실안개 돈 듯 만 듯 썰물 진 모래톱에 궂은비 온 듯 만 듯 둥그래 당실 둥그래 당실 돌아보면 꿈만 같고 묶지 못한 옷고름같이 두서없는 옛이야기 어디 한번 풀어나 보자

 따개비 젖은 울음이 숨은 여에 그득하다

 

 산으로 간 남자들은 이름마저 불에 타고

 들에 엎딘 여자들은 바다에 던져졌다

 해마다 정월만 되면 넘쳐나는 제삿밥

 

 사라진 발자국들 물속 깊이 잠겼을까

 쉼 없는 자맥질에 숨이 가쁜 잠녀 할망

 서우봉 넘은 바람이 애기무덤 훑고 간다

 

 감장 못한 주검들이 감저 지슬 키운다는

 검은 밭담 둘러쳐진 너븐숭이 옴팡밭엔

 빗돌만 외롭게 누워 숨비소리 캐고 있다

 

 


 

곤을동*을 지나며

 

 

정당 대신 쇠사슬이 걸음을 막는 을레

세간붙이 하나 없는 무너진 돌담 안엔

개망초 억새 무리가 주인 행세 하고 있다

 

장마가 끝났는지 회북천도 말라 있다

야윈 등 드러낸 채 닳아가는 검은 돌들

개울이 바다가 되면 사람들이 돌아올까

 

물이 사철 고인 땅은 눈물이 많다지만

속으로만 울다 울다 눈물샘이 막힌 마을

냇둑 길 우회로 너머 붉은 해가 저문다

 

언제나 노을 앞에선 제 키를 낮추는 심

그날의 불길 같은 까치놀이 뜨거워져

별도봉 아랫도리가 파도 소리에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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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3 당시 불타 없어진 제주시 화북동의 잃어버린 마을.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