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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제주작가' 2024년 여름호의 시(1)

by 김창집1 2024. 7. 13.

 

 

아버지의 앨범 강덕환

 

 

구순이 다된 아버지가

지나온 세월을 길어 올리던 추억을

가져가라 한다, 그 추억 속에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의 궁핍

43과 전쟁, 분단의 혼란기

코흘리개 모습이나 학창 시절

친구와의 우정, 어머니와의 연애

예비군, 새마을, 민방위복을 입고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던 시절

사진 한 장쯤 있을 법한데

 

없다, 고작해야 한국전쟁 끝나고 입대했던

군대에서의 군복차림 모습이 제일 젊다

거실 벽 괘종시계 곁에 걸기도 했던

자식이랑 손자들이 가득한 가족사진과

향교 훈장(訓長) 임명식 사진을 애지중지하였지만

이젠 침침한 눈, 먹먹한 귀처럼

부착식 비닐이 접착력을 잃어 너덜거리는

그 추억이 담긴 앨범을 가져가라 했을 때

 

요즘 세상에 사진을 앨범에 보관하지 않는다고

스캔으로 떠서 파일로 저장해두면 천년만년

대물림할 수도 있다고, 공간만 차지하는 앨범을

이젠 필요 없수다라고 말 할 뻔했다, 하마터면

 

 

 

 

눈물강동완

 

 

  나는 따뜻한 눈물에 목줄을 걸고 끌고 다니다 거칠게 숨 쉬는 계단을 올라 저녁의 심장 속으로 들어가 잠이 들었다 구름 속에 지어진 빵집 계단 옆에서 몸을 웅크리고 오랫동안 비를 맞았다 나는 버림받지 않았지만 결국 공기 중에 떠도는 팽팽한 꽃의 향기를 맡을 수도 없었어 서글픈 빗방울의 울음소리도 듣지 못했지 나의 모든 환상은 위험하고 쓸쓸하다 내 잠 속으로 들어오는 따뜻한 크림빵 냄새 때문에 자꾸 뒤척거렸지만 눈물들이 메마른 혈관 속을 흐르며 수면제가 되어 주었다 크림빵을 먹고 있는 인형들이 악성 바이러스처럼 내 혈관 속을 다니며 슬픔을 물어뜯고 있다 서리 낀 창문에 엄마 얼굴을 그려 넣던 아이들이 날개 달린 벌레가 되어 형광등 속에 고개를 넣고 파닥거렸다 형광등 안에는 엄마의 눈물이 수 세기 동안 흐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슬픈 낙엽처럼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눈물의 냄새는 삶은 달걀 냄새라는 걸 아시나요 저녁이 되면 내 혈관 속에서 나온 눈알 없는 인형들이 뜨거운 구들장 밑을 탈옥수처럼 파내려 갔다 죽은 자들의 눈물이 새어 나왔다 혼자서 외롭게 죽은 자들은 죽어서도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서글픈 쪽방촌 한 노인의 죽음을 보고 처음 알았다

 

  나는 하안 브래지어를 한 수선화 향기가 나는 수녀를 사랑했다 수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져간 얼어붙은 나무와 찢겨진 나뭇잎에 대한 전설을 투명한 공기처럼 빛 속에서 호흡하고 있다 그녀의 눈 속에서부터 따뜻한 감각들이 목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톱에 붉게 물든 눈물을 영원히 사랑한다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 차가운 말들이 내 손금 속을 흐르다 그녀의 눈물이 되었다 눈물들은 살아남는 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동자에 아름다운 슬픔처럼 오래도록 고이거나 빛 속에서 사라지며 신비스러운 무늬가 되거나 불멸의 존재로 하얗게 굳어가는 것이다 눈물에 대한 서글픈 질문들이 하수구로 사라질 때 나는 흐르는 눈물로 샤워를 했다 눈물로 채워진 빛 속에서 물고기를 잡았다 어부의 황금빛 그물은 바람의 심장에 스며든 누군가의 버려진 말들이었고 얼룩진 마지막 눈물이었다 어부는 눈물로 삽을 씻고 있다 번들거리는 삽이 어부의 목을 향하고 있지만 이 세상의 모든 눈물은 그렇게 쓸쓸히 말라간다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눈물은 마지막에 그렇게 쓰고 있다 누군가의 심장이 차가운 그늘 속에서 뛰고 있다 촛불 같은 심장 속으로 눈물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심장 속으로 들어간 눈물은 지금 혼수상태다

  고통스러워하는 눈물의 심장에 내 따뜻한 손을 갖다 댔다

  모든 것은 겨울밤 깊어가는 신비스러운 무늬 속으로 사라졌다

  눈물은 불규칙한 환상처럼 여러 색깔의 꽃을 피웠다

 

 


 

봄이 오면 - 김경훈

 

 

고관절 수술 후

전혀 거동을 못 하시는

어머니

아프면 죽어야지라는 말

달고 사시다가

따순 날

휠체어 앉혀

동네 밖 바닷길 도는데

봄이 오면 걸을 거라고

뜻밖의 한 마디

한결 마음 놓이는데

희망의 설계 하는데

누구시꽈?’

다음 날 섬망(譫妄)이 왔네

덜컥 아득하여

한 발자국

걸을 수가 없네

집까지는 너무 머네

날은 이리 따순데

 

 

 

 

- 김광렬

 

 

박제된

나비 앞가슴에 꽂힌

저 핀,

 

불빛에 번쩍거리지만

 

여린 생명을

압살하고

얻은

 

향기 없는 영광

 

 

               *월간 제주작가2024년 여름호(통권 제8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