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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여름호의 시조(5)

by 김창집1 2024. 9. 5.

 

 

꽃 진자리 - 김영란

 

 

  부여는 낙화암

  진도는 궁녀둠벙

 

  꽃처럼 떨어졌다는 낙화암 전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먹먹하게 새겨지고 비만 오면 여인의 울음 구슬프게 들린다는 어느 역사 한 귀퉁이 이름조차 올리지 못한 삼별초 왕온의 서글픈 궁녀들, 죽음으로 지켜낸 정절의 시간들 목숨의 뿌리처럼 둠벙으로 내려와 생목숨 부려놓고 간 어여뿐 딸들의 넋

 

  맺힌 한 풀고 가시라

  이승 한 씻고 가시라

 

 


 

해삼 - 김진숙

 

 

어둠을 건너온다

일생이 물컹하다

 

물 밖으로 나온 고모는 금세 단단해진다

 

사는 건

단단해지는 것

 

늦은 저녁상을

차리듯

 

 


 

전주라고 - 오영호

 

 

전원은 들어와도 화면은 먹통이라

 

AS를 쳤네 30분 후에 올 수 있다고

예정된 시간 넘어 다시 물었더니

전주에 올라와 있어요

내려가서 전화할께요

 

전주에 올라갔다고요

전봇대요 전봇대

 

 


 

맨발 - 장영춘

 

 

때로는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할 때

긴 여정의 모퉁이에 약속처럼 피어난

 

물매화 마른 들녘에

맨발로 웃고 섰다

 

초롱초롱 해맑은 그대 앞에 내가 서면

부질없는 생각들이 산비탈로 내려서고

 

슬며시 등 토닥이며

향기마저 모아준다

 

그렇게 가는 거다, 충만함도 나누며

높아진 하늘 보며 막혔던 혈을 뚫고

 

용눈이 가설무대엔

전석이 매진이다

 

 


 

금수(禁樹), 동백 - 조한일

 

 

동백나무 허리께

하나 남은 동백꽃

 

그토록 붉디붉던

유배인의 금수(禁樹)라던가

 

내 너를

지켜 주고자

맹세하는 오늘 밤

 

떨어진 동백 차마

쳐다볼 수 없어서

 

고개 돌려 모함 같은

북풍한설 맞을 때

 

역적이

충신이 되는

반전을 꿈꿨을까

 

 


 

미풍간이식당 - 한희정

 

 

선지피 닮은 낙엽

발등에 엉겨 붙네

뒷마당 연탄불 위 피거품 문 양은솥

추억은

한 국자 한 국자

뭉글뭉글 퍼 올려

 

여고생의 자취방 앞, 감성 따윈 아랑곳없어

술에 취한 손님에게 손목 한번 잡혔다고

처마 밑

무청 이파리

꾸역꾸역 풀 죽었지

 

여전히 시장기 감도는 한짓골 돌아들면

열일곱 심장이 뛰듯 간판 불은 여전한데,

뽀얗게

실루엣 하나

미풍을 몰고 오네

 

 

                   *계간 제주작가여름호(통권 제8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