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순아홉 개의 징검다리
돌은
뛰어넘지 못하는 얕은 물을 거스른다
그래서 자주 먼 물 아래로 잠긴다
발자국에 맞춰
심장의 박동 소리가 조금 올라가는 것은
두려움의 간격으로 놓여 있는 돌이 아니라
나의 무게 중심을 알지 못해 기우뚱한
흔들림 때문이었을 것이다
망설임이 더욱 나를 흔들고
일렁이는 물살이 안착을 저지한다
젖으면 될 일을 물에 드는 것을
꾸중으로 들었던 어렸을 때의 기억,
참새처럼 콩콩 뛰면 되는데
어룽어룽 물살이 어지럽다
물의 눈에 집중,
물에 이린 하늘을 보지 마!
물결 없는 물에 물의 얼굴을 만든다
오도 가도 못하고 발을 붙이고 서 있으면
섬이다
섬들이 퐁퐁 솟아 물둘레를 만든다
내 발을 적시지 않으려는 물둘레
나도 모르게 내딛는 걸음은 수를 센다
예순아홉 개의 골짜기,
나의 숨소리와 물의 거품과 물결의 소리는
한 칸씩 화음을 만든다
건너가게 하는 건 언제나
심을 딛고 발자국을 남기는 다리이다
♧ 나무가 되어가는 사람
발걸음 주춤거리며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남자는 두 손으로 카드처럼 잎을 펼친다
일 년 구독 현금 다섯 장!
선의의 음성이 들린다
내미는 손이
잔인하게 두목 치기 당한 나무처럼 머쓱해진다
갑자기 다가온 유리문에 부딪혀 명해진 채,
돌아서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냥 그대로 서버려서는
잘려 밑둥치만 남아 외면당하는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나무
가지가 자라고 잎을 내밀고
한때는 아름다운 꽃도 피울 수 있었다
바람같이 앞만 보고 가는 사람과
애써 잡아야 하는 사람 사이에 후줄근히 서서
코를 풀어 던진 휴지처럼
비 맞고 널브러진 목련꽃을 바라본다
잘라버리고 싶은,
부채처럼 푸른 잎을 펼쳐 쥔 손을 움츠리고
그 자리에서
열리지 않는 문을 두드리며
나무가 되어가는 사람
♧ 좋은 날이야
바람이 슬쩍 지나가며 말한다
연날리기 좋은 날이야
새떼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며 말한다
높이 날기 좋은 날이야
개양귀비꽃밭 빈터가 눈을 찡긋하며 말한다
배경이 참 좋은 날이야
하늘을 배경으로
울기 좋은 날도 있구나
연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을라가
온몸을 흔들어대었다
배경에 밀어 올리는 바람이 있고
그림이 되는 하늘호수가 있다
해를 향해 올라간다
파란 하늘 개구리 헤엄쳐 올라간다
외줄에 목숨 걸고 간들간들 수평을 잡는데
새 떼들이 우르르 박수를 보낸다
센바람을 안고 날아오르는 것이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외줄을 잡아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눈조차 뜰 수 없는 이 바람을
견뎌보지 않고는
오직 혼자여야만 하는 자리
적당한 곡선과 몸을 끌어당기는
줄의 무게를 유지해야 하는 이 팽팽한 긴장
태양은 알고 있지
개양귀비꽃밭에 꽃씨를 뿌리고
하루의 위안을 얻기 위해
이렇게 바람을 기다리고 있다는 거
♧ 퍼즐 맞추기
핏줄처럼 뻗은 잎맥이
내 심장의 한복판으로 조각조각 갈라진다
생은 어느 순간
색깔과 위치와 모양에 따라 분류되고
갈라지고 사라지고 뚫려서
내가 선 그 자리가 구명
오늘과 내 일은
입 깨물고 견뎌야 하는 세월이 된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잎사귀 하나가
제 세계 전부인 벌레는
단지 잎을 먹었을 뿐
갉아 먹은 구명으로 파란 하늘이 보일 줄 몰랐다
구름이 떠가고 빗방울이 떨어지고
맑은 날 눈부신 햇살이 비칠 줄은
세상에 창 하나 여는 줄도 모르고
제 일을 하는 벌레
가지처럼 뻗은 잎맥을 따라가면
사라진 잎사귀를 그릴 수 있다
색깔과 모양을 연대하여 제 역할을 하는
잃어버린 조각을 찾는다
온전한 그림 하나가 그려지고 있다
내가 선 그 자리에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 (서정시학,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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