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룡만리, 제주밭담
흑룡만리(黑龍萬里). 제주밭담을 쌓아놓은 모습이 굽이굽이 검은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다는 데서 생긴 말이다. 물론 중국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빗댄 표현이지만, 밭담 길이를 모두 합치면 만리장성을 넘어 약 2만 2000km에 이른다고 한다.
제주밭담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독특해서 2013년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정했고, 이듬해인 2014년에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가 선정한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으로 등재되었다.
그러고 보면, 제주밭담은 1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동안 선인들의 노력으로 한 덩이 한 덩이 손으로 쌓아올린 농업유산이다. 화산대지를 일구어 농사를 짓는 동안 나온 돌을 모아 쌓기 시작한 밭담은 바람을 걸러내고 토양유실과 우마의 침입을 막고, 농지의 경계표지 기능도 갖게 되었다.
당국에서는 세계중요농업유산인 제주밭담 보전관리 사업의 하나로 이를 통해 농촌의 문화와 환경을 체험하는 한편, 지역 홍보 활성화를 위해 2019년에 8곳에 밭담길을 조성했다. 구좌읍 월정리의 ‘진빌레 밭담길’과 평대리의 ‘감수굴 밭담길’, 성산읍 신풍리의 ‘어멍아방 밭담길’과 난산리의 ‘난미 밭담길’, 애월읍 수산리의 ‘물메밭담길’과 어음1리 ‘공세미밭담길’, 한림읍 동명리 ‘수류촌 밭담길’과 귀덕1리의 ‘영등할망 밭담길’이 그것이다.
□ 진빌레 밭담길
월정리 해안도로변엔 ‘제주밭담 테마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여러 곳에 교육용 체험공간을 마련해 놓았고, 돌을 쌓아 만든 통시라든가 산담, 불턱, 방사탑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곳을 거치면 바로 진빌레 밭담길이다.
하지만 길이라고 언제나 평화롭고 소통의 창구가 되는 건 아니었다. 그곳은 바로 동부지역 하수처리장 입구였고, 바다에 떠 있어야 할 테왁들이 길 가운데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다. 이유는 하수처리장을 더 이상 확장시키면 어장이 황폐화 된다고 죽기를 각오하고 막으려는 측과 계획에 의해 그걸 확장시키려 하면서 생겨난 충돌의 현장이었다.
어떻거나 대화를 통해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기 바라면서 월정서로를 따라 올라간다. 500m 정도 걸어가니, ‘진빌레정’이란 조그만 정자가 서 있다. 2014년에 세계중요농업유산에 등재된 것은 제주 전역의 밭담이지만, 구좌읍 일대가 밭담길의 핵심권역으로 지정된 것은 세계지질공원과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 ‘당처물동굴’과 ‘용천동굴’을 이루는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지역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렇게 용암이 많이 흘러나온 곳이다 보니, 농경지가 부족하여 지역주민들은 돌과 바위를 깨서 밭을 일구고 담을 쌓아 농사를 지었던 반농반어의 생활문화가 뚜렷이 남아 있다. 이런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를 살피면서 걸으면서 함께 느낄 수 있도록 마련한 길이라 한다.
□ 달라진 농촌 풍경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에는 식량이 부족하여 보리를 주식으로 하였기 때문에 겨울에서 여름까지 대부분의 밭은 보리밭 일색이었다. 보리농사가 끝나고 나서야 보리 그루를 갈아엎고 조나 콩, 메밀, 고구마 같은 걸 심었다. 이후 요소비료 같은 금비(金肥)가 공급되어 식량이 증산되면서 더러 밭을 나눠 환금작물인 유채 같은 걸 곁들였다.
지금은 보리농사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은지 이곳 밭담길 서편은 거의 양파와 마늘을 심었다. 일찍 서둔 밭은 생산이 끝나 다른 작물은 심기 위해 비를 기다리고 있다. 양파는 늦게 거두는 종류를 주로 심어 어떤 밭은 이제야 뽑아서 말리거나 포대에 담아 놓은 곳도 많다. 마늘도 마찬가지다. 쪽파도 있다. 그리고 전에는 밭에 우마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밭담을 전부 쌓았었는데, 지금은 모든 밭에 차가 드나들 수 있도록 다 터놓았다.
나무들은 거의 없는데 바닷바람에 잘 견디는 까마귀쪽나무(구룸비낭)가 드문드문 보이고 돌담을 좋아하는 송악이 담장을 장식하기도 한다. 물론 소나무 무리가 있거나 보리수나무와 사철나무, 보리밥나무가 섞이기도 한다. 무덤들도 제법 많다.
□ 당처물동굴 주변
중간에 감자밭들이 있어 지금 막 꽃이 피기 시작했다. 약속이나 한 듯 중간 몇 밭이 감자를 심었다. 바닷가 모래가 날려 와 모래 섞인 땅이어서 알뿌리 위주의 농사도 많다.
동쪽과 북쪽은 밭이 거의 당처물동굴에 이어지는 제주특별자치도 공유재산 및 문화재구역으로 지정되어 무단 점유 및 무단 경작행위를 할 경우 문화재 보호법과 공유재산 및 물품 관리법에 제재를 받기 때문에 놀려서 개밀 같은 잡초만 무성하다. 경작을 하지 않은 땅이 너무 아깝기도 하지만, 요즘 농사로 수지를 맞추기 힘든 실정이어서 그도 저도 못하는 것 같다.
나오는 길목에서 고추를 심어 잘 가꾼 밭이 보인다. 길옆 울타리엔 요즘 건강식품으로 인기 있는 뚱딴지(돼지감자)가 싱싱하게 잘 자라고 있다. 요즘 농촌에 젊은 일꾼들이 없는지 독특한 작물을 볼 수는 없었다. <계속>
*이 글은 필자가 '뉴제주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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