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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길 이야기

구좌읍 평대리 '감수굴 밭담길'

by 김창집1 2023. 10. 27.

 

 

천년의 숲 비자림과 당근마을 평대리

 

 

  버스에서 평대리사무소 앞에 내렸을 때, 마을소개 안내판에는 비자림과 당근을 내세워 마을 자랑이 대단하다. 사무소 울타리에는 농악대들이 신나게 꽹과리를 두드리며 평대 최고 당근을 선전하는 그림이 도드라진다. 평대리(坪岱里)는 구좌읍의 중간쯤에 자리 잡은 마을인데, 마을 경계는 비자림 너머 돝오름 중간까지 걸쳐 있어 비자림로(1112)를 뼈대로 위아래로 길쭉한 모양이다.

  평대리는 원래 평평하고 너른 땅이라고 해서 제주말로 벵디라 불러 왔으며, 마을은 동동인 갯머리’, 중동인 감수굴’, 서동인 대수굴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요즘 관광시대를 맞아 남쪽의 비자림, 북쪽의 쉰모살해변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자랑이다.

 

 

 

감수굴 가까운 중동회관이 출발점

 

 

  마을회관 울타리를 따라 바다 쪽으로 가다보면, 오른쪽에 20년쯤 되어 보이는 비자나무에 감귤을 매달아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이 보인다. 돌담에는 제주도 사진관이라는 팻말까지 붙여 놓았다. 마침 몇 분의 관광객이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느라 야단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난 긴 골목길 입구에 올레 20코스를 알리는 화살표와 함께 밭담길 표지가 보인다.

  그렇다고 거기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조금 더 걸어가 왼쪽 평대7길로 들어가면 얼마 안 가 중동회관이 나타나고, 그 옆에 감수굴 밭담길 안내판이 나타난다. 이곳도 2016년 지역행복생활권 선도사업인 연계협력사업으로 추진하는 FAO세계중요농업유산인 제주밭담을 활용한 농촌마을 6차 산업화사업으로 조성한 마을 밭담길이다.

  표제로 내세운 감수굴(甘水窟)’은 평대리 중동에 위치해 있는 우물로 물맛이 좋아 인근주민들은 물론 관혼상례에 정화수로 쓰일 정도로 귀하게 사용해 왔고, 동네의 중심을 이루는 곳이어서 대표 이름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한다. 조성된 밭담길은 약 1.5km3040분이 소요된다.

 

 

 

올레 20코스와 일부 겹쳐

 

 

  안내판을 보며 길을 살피고 휴대폰에 담아 놓은 뒤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감귤이 매달린 비자나무 옆, 동쪽 골목길로 들어서면 좁고 호젓한 농로가 나타난다. 왼쪽 커다란 밭은 목초인지 아니면 잡초인지 너른 밭 하나 가득 파랗다.

돌은 무릎을 살짝 넘을 정도로 야트막하게 쌓았고, 거기서 아스팔트길을 건너 조금 가면 올레길은 오른쪽으로 가고 밭담길은 왼쪽으로 갈린다. 밭담길 표시는 머들이네 가족이라고 돌멩이를 디자인한 머들돌이 눈을 빼꼼이 뜨고 화살표로 방향을 알린다.

  새로 접어든 길은 골목길인데 왼쪽에 비닐하우스가 무척 길게 이어지고, 오른쪽엔 50년쯤 되어 보이는 팽나무가 서 있는데, 입구에서 바라보니 폐가(廢家). 조그만 마당 안에 있는 삼간 초가집은 멀칭 비닐을 덮었는데도 벗겨져 지붕의 띠가 삭아 많이 떨어졌다. 밖에는 관광객이 들끓는데, 안으로 들어서면 빈집이 이렇게 생겨나 요즘 제주의 농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해안도로변의 도댓불

 

  밭과 집이 이어지는 구조인데, 어떤 집은 깨끗하게 치장하고 예쁜 꽃들을 심었는가 하면, 그냥저냥 수더분한 집도 있다. 나무는 간혹 까마귀쪽나무 정도 보이고, 텃밭이 아닌 곳은 무를 파종하기 위함인지 빈 밭으로 둔 곳이 많다.

  거기서 오른쪽 골목길로 조금 걸으면 바닷가 해안도로가 나온다. 곳곳에서 녹이 슨 하얀 팻말이 보이는데, 그건 이전에 설치했던 벵디고운길때 것이다. 바다와 해안도로 사이가 비교적 넓은 곳은 더러 쉼터를 만들었다.

  거기에 도댓불이 있었는데, 이제야 설치한 것인 듯, 깬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는 위에 북방고인돌처럼 돌을 고였다. 옆에 넓적한 비에 글을 새겼으되 왕석으로 성을 만든 배들인개엔 멀리 나간 밤배가 어서 돌아오기를, 아들이 눈에 밟혀 할머니는 장작을 이고 오래도록 불을 지폈다. 아슬하게 보이던 불빛은 아득한 사랑이었네.’라 했다.

 

 

 

 

감수굴 정자에 앉아

 

 

  조금 더 걸어 왼쪽으로 들어가면 감수굴이다. ‘감수굴 수덕비(甘水窟水德碑)’에는 숙종28(1703) 제주 목사 이형상이 사찰을 폐쇄할 무렵 이곳 정터왓 부근에서 유생 강씨가 모래땅에서 샘을 처음 발견하였다. 물맛이 좋아 감수(甘水)라 하였으며, 평대 주민 외에도 인근 세화, 한동 주민까지도 관혼상례시 정한수로 귀하게 사용하였다. 1940년부터 지금의 원통형으로 보전되고 있다. 이 고장 문화를 이룬 감수굴 조상의 혼이 담긴 유산으로 영구히 보전 하고자 수덕비를 세우다.’라 했다.

  지붕을 세우고 원통형의 우물은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옆에 나란히 세운 정자에 앉아 돌아온 길을 되짚어 보니, 밭과 마을길로 이어진 밭담길 중 해안도로나 큰 도로 주변은 민박집과 카페가 많다. 농사를 짓거나 물질을 하는 중에 부업 삼아 민박을 하는지 모르겠으나 손님은 그치지 않는지 걱정된다. <계속>

 

 

                     * 이 글은 '뉴제주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필자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