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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2)

by 김창집1 2024. 11. 2.

 

 

 

봄이잖아요

 

 

두툼한 외투 호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고개 숙인 채 걷고 있노라니

여기저기서 소리가 새어나온다

봄이잖아요

 

꽃집 유리창 너머로

무더기 안개초가 손을 흔들고

노란 프리지어도 웃어 보이고

수선화도 작년처럼 그대로 있었다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고개 들어 하늘과 반기는 꽃들을 보며

혼자 중얼거린다

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고사리

 

 

우뚝

서서 쳐다볼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이

 

풀썩

주저앉았을 때에야

탄식처럼 너를 만났다

 

내가 낮아져서야

비로소

네가 보였다

 

오므린 작은 손으로

대지를 뚫고 나은

네가 빛처럼 거기에 있었다

 

 


 

 

 

똥이

더럽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다

 

똥을 보고도

피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그 주인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유서

 

 

위급한 경우에

아이부터 구해주세요

Blood type B’

 

하얀색 소형 자동차 꽁무니에

남긴

석 줄의 빨간색 글

 

 


 

열나흘의 사랑

 

 

그 아비와 어미가 사랑한 나무에서 태어났으나

중력의 힘이 버거워지면 땅에 떨어져 그 깊숙한 곳으로 스스로를 가둔다

일곱 해, 아니 열 하고도 석삼년 후에나

숨이라도 붙어 있으면 빛 한 줄기를 찾아

매미는 날개를 단다, 그 아비와 어미가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여름에 태어나

한 번의 사랑을 위해

치열하게 두 칠일을 산다

열나흘의 사랑이다

 

기다림과 사랑과 죽음의 운명이

이토록 처절한 소리를 내게 하리라

사랑한다’ ‘내 아이의 어미가 되어 주

울지도 못하는 암컷은 가슴으로 소리쳐 답했을 터

 

이 여름에도 온몸이 부서져라 울부짖으며

사랑하는 건

암컷의 수컷도 아니고

수컷의 암컷도 아니다

 

그들의 종족을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그 아비와 어미가 했던 것처럼

임무를 수행하는 오롯한 사랑, 후회 없는 삶

백년의 사랑, 그 부끄럼은 누구의 몫일까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 출판부,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