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꼬
마른 논에 물 들어온다
남북한 정상이 삽으로 논두렁 팍팍
봄 가뭄 들어낸다
그 얼마나 타는 목마름이었더나
그 얼마나 기다리던 물내림이있더나
순천자 필흥 역천자 필망이라고
물 내리는 소리 얼씨구 저절씨구
물드는 소리 지화자, 지화자 좋구나
마른 논에 물 들어온다
무논에 새 날아간다
남북한 정상이 쟁기질하고 써레질하고
씨줄날줄 못줄을 잡는다
그 얼마나 바라던 모내기더냐
그 얼마나 꿈꾸던 두레밥상이더나
남에서 소리하면 북에서 받고
북에서 줄을 띠면 남에서 이어가고
무논에 새 날아간다
철조망에도 꽃이 핀다
남북한 정상이 분계선 마주 보고 손을 잡고
65년 북풍한설 녹여낸다
이 얼마나 뜨거운 악수더냐
이 얼마나 피어나던 하나의 봄이더냐
‘평화와 번영’을 심는다고 아리랑 아라리요
대동강 한강수 합수되는 소리
한라산 백두산 막힌 혈맥 풀어대는 소리
철조망에도 꽃이 핀다
논이란 논
물꼬 터진 여진이다
♧ 도보다리
판문점 옆에 있는
작은 다리일 뿐이었다
중립국감독위원회 캠프로 가는
습지에 놓인 그렇고 그런 다리일 뿐이었다
어쩌다 노루, 고라니만 오가고
왜가리, 해오라기 쉬어가는 다리일 뿐이었다
그렇게 버려진 듯 외롭던 다리가
세계의 다리가 되었다
남북 두 정상이
어깨를 맞대고 걸어갔을 뿐인데도
세계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군사분계선 101번 표식물도 살피고
비무장지대 생태계 못내 둘러봤을 뿐인데도
전 세계가 꽃발을 들었다
두 정상이
버들가지 늘어진 의자에 앉아
배석자도 카메라도 멀리하고
환담을 나눴을 뿐인데도
새소리만 요란하게 들렸을 뿐인데도
지구촌이 바짝 귀를 세웠다
남북 두 정상이
걸어서 건너는 다리가 있어서
70년 묵은 체증이 확 내려간다
봄바람 살랑거리고
걸어서 건너는 다리가 있어서
너도나도 세계의 다리가 되었다
♧ 가출
통일이가 없어졌다
그런데 누구도 찾지 않았다
우리에게 통일이는 언약이고 믿음이었다
그런데 누구도 걱정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누구도 젖과 꿀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통일이는 어디로 갔을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봄꽃들이 한창이더니
환호와 놀람과 희망을 속삭이고 손짓하더니
이어짐과 자유로움과 결집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더니
통일이의 사자후는 어디로 갔을까
통일이가 가출했다
그런데 아무도 속을 태우지 않았다
우리에게 통일이는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을까
봄을 시샘하는 꽃샘바람 때문에 그릴까
성조기 나부끼고 촛불이 꺼져서 그릴까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사람도 통일이를 잊었다
예수도 석가도 공자도 통일이를 언약하지 않는다
순천자도 역천자도 존귀함을 떠올리지 않는다
통일이는 어디로 갔을까
통일이의 사자후는 어디로 갔을까
♧ 그래도 통일이다
통일하자는
그 말이 식상해졌다
통일하자고
너무 많이들 외치다 보니
이제 공허한 메아리가 되었다
통일하자는
그 절절한 말이 다가오지 않는다
통일하자고
너무 오래 소원하다 보니
이젠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통일하자는
그 마땅한 말이 왜 이럴까
통일하자고
내미는 손의 온도가 달라서 그러는가
던지는 돌의 무게가 적어서 그러는가
통일하자는
그 소원의 말이 왜 이럴까
통일하자고
이 정성 다해서 그러자고 노래하다 보니
이젠 통일이란 말도 없어졌다
그래도 통일이다
♧ 복기
아. 그날 피어났던 꽃 송이송이는 꽃사태였을까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군사분계선에서 마주 보고 악수하고
김정은 위원장 그 노란선 넘어와서 포옹하고
문재인 대통령, 저는 언제쯤 이 선을 넘을 수 있을까요?
김정은 위원장. 기럼 지금 넘어가 볼까요?
둘이 손을 잡고 그 선 넘어갔다 넘어오는데
아, 그날 새봄이 불어나서 폐부까지 화들짝 들이찼을까
평화의 집에서 훈민정음 글씨도 감상하고
김 위원장, 새 역사는 이제부터라고 방명하고
문 대통령, 저 길로 백두산에 가 보고 싶다고 물으니
김 위원장, 교통이 불비하지만 편히 모시겠다고 화답하고는
오늘은 북남 관계에서 저녁만찬을 위하여 평양냉면을 가져왔다고 하니
모두들 기립해서 박수를 쳐대니
방방곡곡 냉면 부르는 소리 넘쳐났을까
오후에는 53년생 소나무 식수하면서
백두산, 한라산 흙이 뿌려지고 대동강, 한강수가 듬뿍 부어지고
거기 표지석 앞에서 손도 잡고 사진도 찍고
아, 그날 훈훈한 노래는 우리 그립던 동포 여러분이었을까
두 정상이 도보다리 산책할 때
나란히 걸어가는 뒷모습이 아재종질 사이인 듯
회양목, 신갈나무, 붉나무, 고욤나무, 모감주나무
연두로 피어나서 풍경 속의 풍경을 만들고
녹슨 군사분계선 표지물도 만져 보고
거기 벤치에 앉아 환담할 때
산솔재, 청딱따구리, 소쩍새, 곤줄박이, 쇠박새, 오색딱다구리
반갑다고 평화하자고 자연하자고 화음을 넣어대고
꿩소리 유난히 크게 들리던 한가로운 도보다리를
지구촌이 까치발 들고 주목했을까
아, 그날 그 자리 널문리 선언은 꿈이었을까
그렇게 봄이 쉬이 와도 되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하나 됨을 좋이 선언했을까
여망처럼 봄꽃이 피고 웃음이 벙글고 눈물이 핑 돌았을까
하나의 핏줄. 하나의 역사, 하나의 문화였음을 확인했을까
그렇게 봄이 다 왔는데도
그런 새봄으로도 우리의 가을은 더디 오는 것일까
그렇게 피어나던 꽃 송이송이도 하늬바람 거스르지 못하는 것일까
아, 그날 맺었던 언약은 옥죄는 시샘으로 반짝 사라지는 것이었을까
*시 : 최기종 시집 『만나자』 (문학들, 2024)에서
*사진 : 한라산과 백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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