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불동 구름폭포 - 방순미
금강산 자락 잇닿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동해 굽어보면
공룡능선과 화채능선 속으로
꽃 같은 바위 봉우리
바다와 구분 없는
구름바다 이루면
설악산 봉우리마다
쏟아지는 폭포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 아니듯
구름폭포 속 천불 바위
좌선에 든다
♧ 겨울 함백산 – 서병학
겨우내 눈 이불을 덮고 있다
바람을 먹고사는 풍차들 배가 부른지 게으름을 피우고
천년 넘게 살아온 주목은 잃어버린 나이를 시멘트로 채웠다
꼿꼿함을 못 견디고 등이 구부러진 나무
자존심을 조금 굽혀야 통과 시킨다
발 디딜 틈 없이 왁자지껄한 정상
찰칵 잘칵 소리와 함께
만세도 부르고 보이자도 만들고
표지석을 끌어안아 보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한다
♧ 알고리즘 – 오명현
나는 전생에 선업을 많이 쌓은 게 분명하다
핸드폰에서는 근사한 제안이 끊이질 않는다
모처에 땅을 사면 수억은 금세 남길 수 있다고도 하고
이튿날 상한가 칠 주식 종목을 알려 주겠다고도 하고
까다로운 심사 없이 거액을 대출해 주겠다고도 한다
땅이나 돈이 너무 많아 주체할 수 없다거나
내 돈을 가져다가 이자를 줄 수는 없느냐고
되레 허세를 부리는 것으로 끝맺지만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면
내가 구매하려는 상품 목록을 알아서 띄워 주고
심폐기능 저하로 과하는 내게 요긴한 건강식품을
좌르르 띄워 주는데
솔깃한 동영상은 덤으로 따라온다
내로라하는 인사일 리 없고
내로라하는 시인도 아닐진대 극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전생에 쌓은 선업 말고도
내가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인 때문이다
전화번호와 이력, 유전자 정보와 진료기록은 물론
심지어 생각까지도
발가벗긴 채로 내던져진 때문이다
---
*하이데거의 표현을 차용함.
♧ 돌담 – 윤태근
제 각각의 돌덩이들
완강한 스크럼
제자리에 꼭 박혀
빈 틈 없는 맞물림
돌담으로 하나 되어
말없이 당당하다
너희도 그런 거야?
묻기라도 하듯이〜
♧ 정북동 토성 – 이규홍
무심천을 품은 까치내
호반에 내려앉은
석양빛이 곱다
누가 이곳에 성을 쌓았는가
전쟁을 대비한 철옹성이 아니라
평편한 평지에 네모난 토성
창고를 짓고 우물을 팠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와서들 먹고 마셔라
잘 사는 일은 서로
죽이는 전쟁이 아니다
무심히 흐르는 무심천도
이곳에 와서 춤을 춘다
바람이 자유롭게 노닐며
천년을 돌아다보는
여유로운 토성 언덕에
오늘도 인생 샷은 터지고 있다
---
*정북동 토성 : 청주시 정북동에 있는 네모반듯한 모양의 토성으로 사적 제415호로 지정되어 있다.
♧ 해무海霧 - 차영호
무슨 소리
들어 있을까?
바다 귓구멍을 들여다보다
늙은
아이
궁금한 그림자는
저녁 바다를 연주하는 나발 귓바퀴에
찰싹, 붙여 두기로 하였다
*월간 『우리詩』 10월호(통권 제436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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