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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가을호의 시(5)

by 김창집1 2024. 11. 11.

 

 

        [특집_ 4.16 그날을 기억하다]

 

 

그냥 슬프다는 것은 슬픈 것이 아니다 - 이윤승

 

느닷없는 광풍이었습니다

시간이 엎질러져서 나뒹굴었습니다

 

말발굽처럼 다가오던 화급한 시간

요술거울을 보고 있던 일곱 시간

 

거대한 폭력의 시간 앞에서

망연자실 고개만 숙였습니다

 

고개를 들어 생각할 때마다

꽃들이 아.....게 핍니다

 

미안하다는 말이

정말 미안할 때가 있습니다

 

                 * 시집 눈가에 자주 손이 갔다(문학의전당, 2017) 수록

 

 


 

노란 헬멧 - 이정은

     -2학년 9반 정다빈

 

 

수련회 가서 짚와이어 타고

내려올 때 함께 했지

 

헬멧이 너의 머리를 보호해 줄 거야

꼭 쓰고 내려와

엄마의 속삭임이 들리는데

 

노란 헬멧이

보름달 위로 떠

밤이 아닌 밤이 되면

 

엄마는 노란 리본을 만들지

 

내가 엄마를 보호해 줄게

노란 헬멧처럼

노란 리본 만드는 엄마 손을

 

 


 

해녀 매옥이 - 허영선

 

 

기다려라

아직 길 잃고 헤매는 아이들아

집으로 가는 길 잃은 풀씨들아

 

내 자맥질로 네 숨을 일으켜주마

네 길 열어주마

 

얼마나 얼었느냐

바다 벼랑까지 숨 참아본 나는 알지

 

얼마나 질렸느냐

맹골수도* 탱탱 곤두박질치는 물살에 몸 적셔본

나는 알지

 

층층 숨의 길 내려가 보지 않은 자 모르지

살 찢어지며 살 우는 소리 모르지

 

물아래서

물위에서

파편처럼 터지는

땅끝마저 하늘마저 찢기는 소리 모르지

 

눈먼 파도는 파도끼리 소리쳤지

맹골수도 아직도 길 잃고 헤매는 아이들아

숨길 막혀 얼어붙은 아이들아

 

내가 엄마다

내가 엄마다

 

울지 마라

기다려라

 

내 깊은 자맥질로 네 여린 손가락 잡아주마

허우적 허청대는 네 젖은 꿈 일으켜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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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진도군 서거차도와 맹골군도 사이를 지나는 바닷가

 

                  ※ 시집 해녀들(문학동네, 2017) 수록

 

 


 

뫼비우스의 띠 - 김연미

 

 

낮과 밤의 문턱은 어디쯤이었을까

악몽처럼 뒤집힌 해맑은 영혼들이

잔잔한 포말이 되어

사그라든

그 지점

 

천 일 동안 비 내리고

천 일 동안 물에 잠겨

목젖 더 깊숙하게 가라앉던 네 이름

종잇장 하나를 두고도 들리지가 않았지

 

뱃길을 따라

다시 여기 왔을까

멈춰 선 자리에서 시간의 결 헤쳐보면

한 바퀴 세상을 돌아온

영혼들이 있었다

 

 

 

 

노란 고래의 꿈* - 김영란

     -세월호 단원고 명예졸업식

 

 

끝내 오지 못 했구나 빈 의자만 남긴 채

와르르 무너져 주저앉은 울음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세월은 또 흐르고

 

이름 하나 눈물 하나 아롱지는 시간들

침몰할 수 없는 사월, 희망을 꿈꾸며

너 앉던 바로 그 자리 꽃다발 놓아두고

 

가끔씩 물 밖에 숨 쉬러 나왔다가

천 개의 바람으로 세상 구경하다가

노랗게 승천하거라 내 예쁜 고래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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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고에 세워진 조형물의 제목.

 

 

                    *계간 제주작가가을호(통권 제8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