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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의 시(12)

by 김창집1 2024. 11. 29.

 

 

골목 깊은 집

 

 

  골목 깊숙이 낮은 무릎 베고 누워 오래된 언어가 푸석푸석 잠자는 집 잔망스런 참새 한 마리 드나들지 않는, 참긴 대문이 벽화처럼 걸려 있는 담벼락에 잿빛 나비들이 장식처럼 일어난다

 

  감나무 한 그루 살지 않는 깐깐한 시멘트 마당 귀퉁이에 새끼 돼지 한 마리, 토끼 두어 쌍이 닭들과 오곤 조곤 살았다 키 큰 엄마 걸터앉기 딱 맞는 툇마루, 골바람이 지나다가 짧은 두 다리 달랑거리며 웃고 있는 유년의 멈춘 시간을 턱 걸어놓는다

 

  빈터에 누워 있던 게으른 바람이 뒷문 열고 슬며시 마당 한 자락 쓸면 나른한 겨드랑 사이로 단잠이 스며든다 푸슬푸슬 깨진 바닥 틈새를 비집어 열고 빈 마당 가득 서성이던 성성한 풀들이 푸른 귀 세우고 닫힌 부엌 엿본다

 

  긴 골목 빠져다가 돌아오지 않는 희미한 발자국들. 장독대 배 항아리에 들썩거리는 묵은 이야기 TV는 오늘의 문을 닫고 침잠하는 방으로 묵중하게 들어간다 담 너머 고개 내민 분홍 장미 몇 송이,

 

  오래된 사진 속에 갇혀있는 앞가르마 곱게 탄 우리 기다리며 처연히 빈 고샅을 지키는 골목 깊은 집

 

 


 

안개,

 

 

안개가 쌓은 벽이다

그 벽에 갇혀

젖은 시간을 되새김질하던 소

한쪽 사면에 자일을 걸고

위태롭게 발을 옮긴다

애당초 없는, 안개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고삐의 길이만큼 원을 그려

잠긴 집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지독한 벽

말뚝을 박아 집을 만든다

발을 움직일 수 있는 반경은

여린 풀잎의 집이 되고

반경 너머는 안개의 집이 된다

 

안개의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산

까무룩 젖은 소의 눈망울 속에

예전의 집이,

기와지붕이 보인다

흩어져버린 징 소리도 들린다

시간의 맷돌은 쉬지 않고 돈다

 

울어 본 기억이 없는 소는

길게 목을 빼고 산등성이를 오른다

안개 속을 헤엄쳐 수면 밖으로 떠올라

집으로 가고 싶다

젖은 초록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내 그림자의 반경 너머 안개의 문이 열리지 않는다

 

 

                   *조직형 시집 천 개의 질문(서정시학,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