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김
바다를 좋아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무엇이 사라져버린 듯한
사내는
설핏한 미소로 무장한 채
그의 입에서는 언어보다는
하얀 입김만 얼얼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 한다
강물은 흘러가버리지만
파도는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밀려온다는 것
며칠째
대설주의보와 대설경보가 번갈아 발령되고
긴급재난문자가 요란한 신호음과 같이 배달되자
바다로 가지 못한 사내는
추녀 끝 고드름
비수처럼 매달린 고드름
고드름 끝 물방울
비수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언어 대신 뿌연 입김만 유리창에 남긴다
다시 재난문자가 제 혼자 징징댄다
♧ 혼밥
누군가가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국이 되고 반찬이 된다
당신의 얼굴만으로도 따뜻한 국이 되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그대의 말이 맛있는 반찬인 걸
혼자 먹는 밥에게
중얼대며,
가슴까지 타고 내려오는
끼니를 위해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후’ 불어 먼지를 털어버린 식탁에서
내 소리에 귀를 더듬고
네 손맛을 낚아채려 한다
겨울 그 깊이만큼 묻혀 있던 독처럼
혼자 먹는 밥은
‘싸’하다
♧ 그저 비로 흐른다지요
가로등 불빛 아래서
하늘을 보면
내리는 비는 눈으로 변한다지요
기다림이 많은 사람은
만남의 설렘이 눈으로 날린다지요
그들에겐 오늘이
한여름 밤의 성탄절이라지요
그러나
저 이십오 도의 희석식 소주로 풀어내는 사람들에겐
그저 비로 흐른다지요
그 비에 세월의 이야기 한 무더기 묻는다지요
♧ 나도 예전엔 아무 일 없었다고
한 사내가 말한다
나도 예전엔 아무 일 없었다고
그러다 짤렸고
반지하에 살았고
고시원에서 지냈고
이젠 아무데서나 잔다고
그 후엔 모두가 등을 돌리더라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햇빛이 그리웠다고
집밥 냄새가 너무 그리웠다고
친구와 소주 한잔 하며 밤새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그리고
가족이 그립다고
그 사내의 말은 이게 끝이었다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 (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
* 사진 : 가을 풍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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