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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5)

by 김창집1 2024. 12. 9.

 

 

입김

 

 

바다를 좋아하는 한 사내가 있었다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무엇이 사라져버린 듯한

사내는

설핏한 미소로 무장한 채

그의 입에서는 언어보다는

하얀 입김만 얼얼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가 바다를 좋아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 한다

강물은 흘러가버리지만

파도는 왔다가 가고 갔다가 다시 밀려온다는 것

 

며칠째

대설주의보와 대설경보가 번갈아 발령되고

긴급재난문자가 요란한 신호음과 같이 배달되자

 

바다로 가지 못한 사내는

 

추녀 끝 고드름

 

비수처럼 매달린 고드름

고드름 끝 물방울

비수처럼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언어 대신 뿌연 입김만 유리창에 남긴다

 

다시 재난문자가 제 혼자 징징댄다

 

 


 

혼밥

 

 

누군가가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국이 되고 반찬이 된다

 

당신의 얼굴만으로도 따뜻한 국이 되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그대의 말이 맛있는 반찬인 걸

 

혼자 먹는 밥에게

중얼대며,

 

가슴까지 타고 내려오는

끼니를 위해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불어 먼지를 털어버린 식탁에서

내 소리에 귀를 더듬고

네 손맛을 낚아채려 한다

 

겨울 그 깊이만큼 묻혀 있던 독처럼

혼자 먹는 밥은

하다

 

 


 

그저 비로 흐른다지요

 

 

가로등 불빛 아래서

하늘을 보면

내리는 비는 눈으로 변한다지요

기다림이 많은 사람은

만남의 설렘이 눈으로 날린다지요

그들에겐 오늘이

한여름 밤의 성탄절이라지요

 

그러나

저 이십오 도의 희석식 소주로 풀어내는 사람들에겐

그저 비로 흐른다지요

그 비에 세월의 이야기 한 무더기 묻는다지요

 

 


 

나도 예전엔 아무 일 없었다고

 

 

한 사내가 말한다

나도 예전엔 아무 일 없었다고

그러다 짤렸고

반지하에 살았고

고시원에서 지냈고

이젠 아무데서나 잔다고

 

그 후엔 모두가 등을 돌리더라고

 

한참을 있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햇빛이 그리웠다고

집밥 냄새가 너무 그리웠다고

친구와 소주 한잔 하며 밤새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고

 

그리고

가족이 그립다고

 

그 사내의 말은 이게 끝이었다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월간문학 출판부, 2024)에서

                                      * 사진 : 가을 풍경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