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집 : 제주의 청년작가, 그들의 시선
♧ 자리끼 – 강지해
잠결에 자리끼를 쏟았다
많이 착한 개가
고개를 들어
덜 착한 나를 애처로이 본다
흥건한 바닥을 닦아야 한다
닦는다고 닦아질 어둠인가
무슨 재주로 닦아낼 것인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스위치가 있다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으며 너는 말하지만
정답을 알아도 말할 수 없는 때가 있잖아
나도 이 어둠이 단지 어둠뿐이라는 걸 알아
나도 할 만큼 했다는 걸 알아
그렇지만,
내일 당장 내가 있는 곳에 갈 거야 하지만 너네 집엔 안 갈 기야 너는 나를 불편해하니까 아니야?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바랐다고 그러니? 내가 돈을 해달랬냐 뭐를 해달랬냐 너는 왜 나를 신경 쓰지 않아?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
스위치 보다 먼 빨래 바구니 앞으로 기어가
아직 축축한 수건을 한 장 꺼낸다
이것으로 과연 닦을 수 있을까
깨끗한 바닥을 다시 부를 수 있을까
낯선 무늬가 보인다
처음 보는 수건인데……
우리는 이토록 다른 생의 디자인
이제 그만
버릴 때도 됐지
하지만, 다 알면서도, 또 다시,
대충 닦은 얼룩이
어둠 속에 아로새겨진다
끝끝내 밤을 떠나지 못하는
몇 억 광년 전
별빛처럼
♧ 점심께 – 문경수
대형 트레일러가
소형 트럭을 곤죽으로 만들고
닭 깃털이 낙엽처럼 갈지자를 그리던 한낮
으깨어진 생명들이 볕에 익어가던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인부들은
달구리처럼 조용했다
하울링이 귀를 찢는데도
확성기를 쥔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한 사람의 적막한 절규가 광장을 덮던
한때가 있었다 이 짧은 휴식을
눈감아주는 낙엽의 속삭임이 있었다
□ 시
♧ 명예졸업장 - 강덕환
별이영 달
몬딱 타당 주겐 해도
나 말다
종이텁 ᄒᆞᆫ 장만 도라
학교종이 땡땡땡
만국기 휘날리던
운동장, 4․3으로 그곳이
피범벅으로 물들었던
그루후제
학교마당 다녔다는
종잇장 하나
만국기처럼 하늘에
휘날리고 싶었던
하, 명예졸업장
♧ 어둠속의 쥐 – 강동완
어미쥐 한 마리가 고기가 섞인 쥐약을 먹고 죽었니.
어린 쥐들이 너무 슬퍼 쥐약을 먹고 같이 죽으려고 했다
나는 도의적인 책임으로 쥐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나의 자리는 장례식장 맨 앞자리였다
수많은 아픈 쥐들이 혀를 내밀고 나를 쳐다봤다
장례식은 검은 폭설 같았다 너무 추운 하루였다
모든 것은 침묵에 가까웠다
쥐들은 서로의 빰을 때리기도 했다
그러면 어두운 구명 속으로 빛이 들어오고 환해지기도 했을까
쥐들은 장송곡 대신 씩씩하게 군가를 불렀다
밖은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고 쥐구멍 속으로 빗방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빗물을 막아 내던 아빠 쥐는 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겨우야 살았다
아빠 쥐는 우울한 예감 때문에 어린 쥐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긴다
유언 속엔 사나운 울음밖에 없었다
나와 엄마는 더 이상 쥐와 협상하지 않았다
쥐구멍 속에 바리케이트를 쳤다
우리는 아직 전쟁 중이다
쥐구멍 속으로 햇살 나비들이 들락거렸다
검은 혀들도 소리 지르며 구명 속으로 들어간다
검은 안개들이 바닥을 기어 다니며 구명 속으로 사라졌다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무지개 하나 소리 없이 아름답게 떠오르다
무지개 사이 죽은 쥐의 그림자 어슬렁거리다
♧ 만다라의 체형 - 고영숙
그늘을 그려 넣는 사람들
깃털을 털고 날아가는 동공은 검은색이다
꿈 이후의 일이었다
나무 그늘에 앉아 있던 나비의 눈꺼풀 밑에서 일어난 일이라
깊은 꿈은 모른다 하였다
누군가의 그림자가 걸어 나오는
도안 밖
늘 변하는 건, 빛깔의 체형
몸이 갇힌 원형, 착상된 물방울을 붓으로 쓸어버린 완성의 순간
문양 속 몇 겁의 주름진 잎들이 펼치는 격렬한 생사(生死),
반경 안은 붉은 어루러기,
입을 다물었는데도 터지는 패턴
버린 꽃은 늘 아까워 모래에 검은 달을 베낀다
봉인된 후생이 윤곽 없이 허물어진다
연두 달 잔금이 새기진 상(像)이 이파리처럼 돋아난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고 꽃잎은 신명해진 징후를 찌른다
주기가 끝난 검은 달은 깨져버린 거울 조각
채색이 빠져나간 몸은 텅 빈 내막
* 사)제주작가회의 간 『제주작가』 2024 겨울(통권87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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