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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한라산문학' 2024 제37집의 시(1)

by 김창집1 2025. 1. 3.

 

 

[초대시]

 

 

아름다운 능선 - 김순선

 

 

사막을 건너온

낙타의 등 같은

조랑말의 능선

초원을 달리던 오름을 닮아가는 곡선 위에

빛이 흐른다

 

어둠을 밀어내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바람 따라 가지를 뻗듯

고개 숙인 그의 꿈이

꿈틀거린다

 

듬성듬성 늘어진 갈기 뒤로

오름을 닮아가는 그의 등허리가

시리도록 아름답다

 

 


 

소실점消失點 - 송상

 

 

돌아갈 구간마다 열쇠가 필요했다

문을 열고

또 문을 닫고

 

발목 닳도록 걸어왔고

손톱 빠지며 걸어갈 것이다

 

사실 그것이

돌밭인지 바늘길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고통이라 생각할 때마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 너를 보았다

 

너의 야트막한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기억의 냄새들

웃음처럼 들썩들썩 거렸다

 

혼자 침묵했고 혼자 배고팠던

눅눅한 새벽

민들레 씨앗처럼 멀어져간 별들아

 

너와 나는 늘 공집합이었다

 

너의 뒷모습을 엿보기 위해

비스듬히 거울을 내 앞에 두었다

발아래로 떨어지는 다정한 침묵들

 

뒷걸음치며, 한 점, 사라져 갔다

 

휘청거렸지만 슬프지 않았다

네가 주고 간 음성이

오히려 서릿발처럼 따뜻했다

 

 


 

새벽, 신사수마을에서 - 양전형

 

 

바람이 빗겨주는 머리카락으로

갈 때를 예감하는 갯억새 쓸쓸하다

스산한 늦가을

나처럼 서쪽으로만 가야 하는

외롭게 늙은 달빛도 정처 없다

 

다시 새벽, 신사수마을 갯가

또 하루를 들어 올리는 하늘은 끙끙대고

긴 밤 지새운 갈매기 한 쌍

파도에 올라 행복을 저울이는데

낙엽으로 도두봉 기슭을 낙하하는

머리도 꼬리도 없는 세월

 

이쯤까지 살아온 업보가

갈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을 꺼내더니

갯바위를 치오르는 물결 속으로

무리지어 장렬히 산화한다

 

나도 나비처럼 날 수 있겠지

기어이 당도해아 할 저 먼 산기슭

이 바다를 품고 그리움들을 품고

바람 따라 하늘하늘 가아 하겠지

 

 


 

천수동, 기억 - 양호인

 

 

  비 오는 거리

  나무가 수직으로 서 있다

 

  건널목, 하안 줄 위를 걷는 사람들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

 

  여기쯤일 수 있다. 기억의 언저리를 맴도는 날이 있다. 신출내기 사원은 탑을 높여야 했다. 장대비 쏟아지던 날 비옷 속에 계획을 숨겼다. 버스가 다니지 않던 길을 걸었다. 곱슬머리는 헝클어지고 방수가 되지 않은 구두가 빗물에 흠뻑 젖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놀란 눈이 수직으로 내리는 비를 건너 왔다. 대문이 열리고 내 모습에 놀란 그들의 감탄사, “이 빗속을!” 손에 쥐어진 봉투는 빗속을 걸어간 대가다. 나무에 달린 열매가 많아 나뭇잎은 생기가 돌았다. 빗속에서도 내일은 계속되어야 했으니까.

 

  장맛비가 알려준 마음 사용법,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빗속을 걸었다

 

  기억 속

  비 오는 거리를

  고독을, 불안을 보라색 비옷으로 가리며 걷는다

  처연히 내리는 빗방울의 쓸쓸함이 내 안으로 들어오고

  기꺼이 가슴을 열었다

  만유인력 이후 사람들은 수직으로 걷는다

  상자 안에 누울 때까지

 

  장대비를 받아낸 우비에서 빗방울이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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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라하의 일기(허만하 시인의 시) 중 인용

 

 


 

장미의 일기 - 이재한

 

 

문득 그리움 하나가

 

어둠을 파고 있었다

 

전율처럼 부슬부슬

 

새벽도 내려앉았다

 

오직 한 사람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

 

달리는 차창 가에도

 

한 송이 장미는 발그랗다

 

보아라

 

침묵아

 

어머니 한숨 같은 탄식들아

 

!

 

마음이 탄다

 

새벽이 탄다

 

한 몸

 

태워도

 

태워도

 

모자랄 까만 그리움들아

 

 

              * 한라산문학동인회 간 한라산, 보길도를 걷다2024(3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