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더디 오는 너
너, 부르면
화살처럼 달려올 줄 알았다
적어도 끊어진 다리 새로 놓거나
막아서는 신들 넘거나 휘돌아서
오늘이나 내일 환하게 웃을 줄 알았다
그런데 오지 않는 너,
산사람이 되어서 언 발 도려내면서도
피의 대기를 보상하라고 거리 행진하면서도
저곡가 저임금 정책에 신음하면서도
내내 기다렸다
온전한 너이고 싶어서
살아남은 자의 의무로 남은 불씨 되살리고
뜨거운 아스팔트에서 스크럼을 짜고 산산이 부서지면서도
대추리가 깨지고 구럼비가 깨지고 밀양이 깨지고 성주가 깨지면서도
오체투지로 길을 내고 풍등을 날리면서 지체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그런데 오지 않는 너,
산이 높아서도 아니었다
물이 깊어서도 아니었다
철조망이 막아서도 아니었다
바다가 흉흉해서도 아니었다
너, 부르면
등 뒤에서 가쁜 숨 몰아쉴 줄 알았다
온전한 네가 되어서
평화롭게 사람답게 살아갈 줄 알았다
더디 오는 너,
♧ 삼일절에
3월 1일 정오, 식구들
봄눈 내리는 거리로 쏟아졌다
나주댁 나주양반 며느리 으니랑 와니랑
발자국들이 뽀드득뽀드득 생겨난다
아들 며느리는 나란히
으니랑 와니는 삐틀삐틀
나주댁은 모걸음 나주양반 팔자걸음
발자국들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발자국들이 수백수천 생겨나고 있었다
비탈에서 미끄러지고
언덕길을 기어오르고
배를 잡고 깔깔거리면서
눈사람도 만들고 눈 사진도 찍고
서로들 눈싸움이 한창인데
와니가 지 엄마 막아서며 사랑하는
우리 엄마는 안 된단다고 한다
그래 대한민국 만세다
그 벌게진 손잡고 호-호- 불었더니
따뜻해서 좋다고 한다
다행이었다 빠지는 온기
아직까지 붙들고 있었으니
태극기가 바람에 펄럭인다
♧ 모시나비는 돌아오고 싶다
한디기골 14세 소녀가
길림성 목단강 위안소로 끌려갔다
강제로 징집을 당해서
트럭에 실려 기차에 실려
분간할 수 없는 밀림 속으로
아비지옥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거기서 영문도 모르고
-너희들은 인간도 아니라며
-오직 황군을 위한 암캐일 뿐이라며
찢겨지고 발가벗겨지고
군홧발에 채이고 구석에 몰려서
소녀를 잃어야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지켜줄 이웃도 나라도 없었다
이름도 고향도 모두 버려야 했다
혼이란 혼 다 빠져서
몸이란 몸 다 헐어져서
하루하루 살아가야 했다
하루하루 죽어가야 했다
그렇게 죽어간 소녀들이
이십만 명이라고 하니
그렇게 돌아올 나비들이
이십만 마리라고 하니
♧ 철쭉제
일림산 철쭉길
오가는 사람들 마냥 좋아
저마다 꽃물이 들었구나
철쭉인 듯 사람인 듯
혼자서 새침하게 가기도 하고
둘이 셋이 모여서 가기도 하고
다리 아프다고 쉬었다 가기도 하고
뭐가 급하다고 잰걸음으로 가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 철쭉나라 노닐다가
혼자서 오른 사람은 혼자서 내려가고
여럿이 오른 사람은 여럿이 내려가고
싸목싸목 오른 사람들 싸목싸목 내려가고
후여후여 오른 사람들 후여후여 내려가고
철쭉길 삼천 리
오가는 사람들 마냥 봄물 들어서
저마다 활짝 피어났구나
백두대간 손 맞잡았구나
*최기종 시집 『만나자』 (문학들,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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