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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2)

by 김창집1 2025. 1. 19.

 

 

안나푸르나 가는 길 - 김정식

 

 

더 이상 서로의 창끝을 겨눈 깃발이

펄럭이지 않는 무한천공

밀주창을 한잔하며 결기를 다져 본다

고도 4,000m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박동하는 심장

암릉지대를 지나고

한 평의 고단한 짐을 지고

강가푸르나를 지난다

끝이 보이지 않는 앞날의 좁은 길

협곡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

흰색 룽다가 거센 바람에 파열음을 내며 나부낀다

웅장한 산일수록 먼 곳이 가깝게 보이는 법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

두 손 모아 인사드리며

한 그루의 나무도 살기 힘든 척박한 땅,

룽다의 깃발 소리를 듣는다

산장을 이어 주는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나무다리를 건너

이제 고도를 올려야 한다

노새가 먼저 떠나고

나는 그 뒤를 걷는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눈보라는 거세다

만년설을 스치는 고요

어둠이 내려온다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과

할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함께 오르는

달빛조차 시린 저 설산.

 

 

 

 

다시 바람 도경회

 

 

달이 풀잎에 젖는 시간

새는 소리처럼 날아가네

 

자작나무 숲을 후리던

습기 머금어 무지근한 계절풍

등짐을 내리고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마음마다

현이 가늘게 울어

 

노오란 잎새 한 잎에

별이 돋게 일구는 너

 

어쩌면 노래를 멈추지 않는

눈먼 오르페우스인지 몰라

 

 

 

 

천칭자리 - 박숙경

 

 

심장을 잃어버린 사람들끼리 모여

선을 긋고 무늬를 만들어요

 

토끼자리, 물병자리, 외뿔소자리, 마차부자리, 게자리

이름을 지어 이마에다 붙여 놓고

지느러미가 자라나면

세상에서 가장 멀어도

아득하지 않는 말을 꺼내

돌아갔다거나 소천했다거나 그러죠

 

별이라는 말,

이별이라고 읽히기도 해서

대책 없이 눈이 자주 멀어요

 

오늘밤엔

쌍둥이자리가 딱이라지만

여태 되돌려주지 못한 집게발 하나를 품고

전갈자리까지만 걸어 볼래요

 

꿈조차 어지러울 예정이므로

먼 곳의 첫눈 예보나 가만히 당겨 놓고요

 

 


 

박원희

 

 

물은 자유다

물은 높고 낮음을

스스로가 잘 안다

낮은 곳은 채우고

높은 곳은 낮아지는

물은 자유로움이지만 평등이다

그러므로 물은 사랑이다

낮은 곳을 채워야 반드시

아래로 흐르는 물은

평등이고 사랑이고

삶을 아는 거룩한 길을 간다

물은 넘치지 않으면 머물고

채워질 때를 기다리는 겸손함

물은 많다고 고개를 들지 않고

물은 적게 만나면 개울이 되고

물줄기 모이면 내가 되고

내가 모이면 강이 되고

강은 바다로 나아가 화합하고

하나가 된다

파도가 높이 있다 하여도

언제나 낮은 곳을 생각하고

물은 언제나 물일 뿐

 

 


 

암벽 방순미

 

 

도봉산 바위 봉우리

밥만 먹으면 붙어살아

 

절벽 나비 한 마리

바람 일으키며 나는 듯하다

 

선인봉 깎아지른 재원길

춤추듯 오르는 방의천 대장

 

나는 바위를 믿는다는 말

더는 의심치 않기로 했다

 

 

                            *월간 우리1월호(통권 제439)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