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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의 시(8)

by 김창집1 2025. 1. 21.

 

 

여행 3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라 한다

 

잠시

멈춤의 시간만이 있을뿐

 

여행은 낯섬에서 출발하여

낯익음으로 마무리 된다

 

나를 버리고

그 자리에 다시 나를 세우는 일이다

 

여행은 떠나는 게 아니라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 한다

 

오늘과 다른 내일의 설렘과

아무 일이 있기를 기대하는 살아있음으로

 

 


 

여행 4

 

 

이제 겨울이면서도

생명력으로 찬란한 봄이 한 쪽 땅에 가득하다

 

들판에는 하안 볏짚 마시멜로가 생각 없이 널브러져 있는 것처럼

나 또한

어디 찍고 가야 할 곳이 없으니 오히려 좋고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 있으니 참 좋다

 

세련된 커피숍도

이름 있는 명승지도 많지 않아서 더 좋다

 

선택지의 고리가 사라지니

시간의 자유 감각이 자유롭게 내 몸 속에 들어오고

그저 너른 들판은 심심한 공간을 만들어

잠시라도 채우려고 애쓰지 않아도 되는,

 

절로 그렇게 됐다

 

 


 

소금산 출렁다리

 

 

소금산 출렁다리 위를

무거운 땀과 같이 걷다보니

물기 빠진 낙엽 하나

잡힐 듯 바람 따라 흐른다

 

지금쯤이면

나또한

물기 사라진 낙엽이 되어

구름처럼 이 골 저 고을 넘나들고 싶은데

 

나는

지난밤 먹은 술과

되씹었던 안주와

살아온 삶이 뒤엉켜 출렁대며 넘는다

 

저만치

보이는 노란 울렁다리에 닿기를,

석벽에 박힌 잔도를

무심코 걷는 것만으로 잠깐이나마 낙엽이 된다

 

 


 

주왕산 가을

 

 

시월의 끝자락, 무심코 떠난 어느 날

주왕산 가을에 오르다

단풍이 곱다

참 곱게 물들었다

 

공휴일이 아닌데도

초입부터 울긋불긋하다

물든 사람이 많기도 하다

참 많은 사람들이 물들고 있다

 

좌판 아낙네는

썰어놓은 사과 한 조각을 권하고

마을 촌로는 당신의 가을걷이로

한번은 삭정이를 지고

한번은 쭉정이를 안고

쉬엄쉬엄

겨울을 나려하고

 

나는 혼자서

두 사람의 밥을 시키고는

주왕산 산자락에 걸린 황금빛과

그 닮은 사과 막걸리에게

쉬엄쉬엄

대화를 건넨다

 

 


 

그 꽃, 그 이후

 

 

올라갈 때

골에 서면 산등성이만 보이고

산등성이에 서면 골만 보였다

 

내려와 보니

안에서는 벽만 있더니

밖에서는 하늘이 있었다

 

그 꽃, 이후

멀어서 유채밭으로 보이던 것이

가까울수록 유채꽃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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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은의 그 꽃을 원용함.

 

 

              *안상근 시집 하늘 반 나 반(月刊文學 출판부,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