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돌개에서 – 김철선
그대 서귀포에 오거든
을렛길 걷다 한번 걸음 멈추고
외돌개를 보아라
온갖 번뇌 솔바람에 흩날리고
칠십리 바다 굽이굽이 휘감으며
영겁의 세월 넋으로 홀로 서 있는
범섬에 노을 감기우면
남극성 바라보며
행여나 임 오실까 촛불을 켜고
해금강 총석정 길섶으로 발길 옮기다
삼매봉 부여잡는 손길에
이어도에 간 지아비 그리며
시린 눈물 흘리던 곳
외돌개 보면 그대는 알 것이다
홀로의 존재 정녕 그 의미를,
♧ 산은 깊고 물은 높다 – 김태봉
산은 깊고 물은 높다
장군의 팔뚝은 가늘고 어린아이의 다리는 굵구나
천년 묵은 용이 미꾸라지에게 잡아 먹힌다
초생달 옆에 있는 저 보름달은
언제부터 대지를 비추었는가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묻는 이가 있다면
아기는 뛰고 어른은 간다고 말하리라
권위적인 것은 다 가고 새로운 것이 온다
물질문명이 가고 정신문명이 돌아온다
♧ 業障消滅업장소멸 – 양동림
슬픔은 아이를 철들게 한다
어린 동생 다독이며 교복처럼 상복을
차려입고 애이고 아이고 곡을 하는 아이
교실에서 차보지 못했던 완장을 두른 아이
부들부들 떨려 향조차 제대로 태우지 못하는 나를
조용히 기다릴 줄 알고
상심이 크시겠다는 위로의 말도
담담하게 마음에 갈무리 할 줄 안다
이미 다 메말라 갈라지는 가뭄 든 논처럼
쩍쩍 핏줄이 갈라지고 충혈된 눈이지만
그윽히 바라볼 여유도 갖고 있었다
먼 길 가시는 어머니 힘들지 않도록
밥 국 많이 먹어 주시고
술도 한잔 올려 달라고 한다
빈소 알림 현황판이 유난히 넓어 보이고
간단한 상주 목록이 한눈에 들어왔다
조화가 기득하던 복도도 그날따라 넓었고
전쟁터 같던 주차장도 을씨년스럽게 한가한
갑진년 2월 초이틀
이슬비가 이승이승
차마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날
이바이바제
구하구하제
다라니제 니하라제
비리니제 마하가제
진영갈제 사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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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여래멸죄진언
*수보리 존자(석굴암)
♧ 탐진치․14 - 윤봉택
-수보리須菩提
솔잎 바람이 푸르다.
수보리여
수보리여
바람을 보셨는가
능선 지나
숲 새이로 불어 오는
바람의 소리를
들으셨는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려도 들리지 않은
눈먼 거북
수보리여
달빛으로 스민 강물
노 저어 가시는 이는
누구이신가
♧ 가을의 노래 – 정예실
한라산 오름에서 내려오는 바람
억새풀도 눕히고
잔가지에 몰려 있던 이파리까지
모두 내려놓자 숨었던 달 잠든 산빛을 깨치고
고개를 들 때 난 힘주어 가을의 노래를 부른다
황국黃菊은 더 빛났고
코스모스 긴 허리 흔들며
누구이든지 간에
지나는 모두를 반겼다
귀뚜라미 우는 소리 속으로
마당귀의 자욱한 연기가 되어
사방에 흩어지고
제 홀로 깊어가는 가을 밤
알밤 터지는 소리
예까지 들렸고 내 빈자리도 그렇게 깊어갔다
무궁무진한 내공을 지닌 백록담
물은 말랐지만 이름 없는 풀
푸르게 돋아
하늘의 길을 열고
숨죽여 지켰다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 2024/하반기 제2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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