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철나무 열매
♧ 빛과 소금 – 오명현
괴산청소년수련원 아침 밥상에
소금 범벅 계란말이가 나왔다
누군가는
소금을 알맞게 친 걸 까먹고서 한 번 더 친 거라고 하고
누군가의 건너편에 있던 이는
요리사가 실수로 소금을 흠뻑 쏟아서 그렇단다
그 말을 듣고는 어떤 이가
그럼 계란을 더 많이 풀어서 간을 맞췄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자
어떤 이의 건너편에 있던 이는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 많은 계란말이를
몇 안 되는 종사자들이 다 먹을 수는 있겠느나고
결국은 음식물 쓰레기로 그냥 버리지 않겠느냐고 한다
계란말이가 노란 때깔로 빛나는 것처럼
세상의 말씀들은 명랑하게 부유하는데
소금은 쥐 죽은 듯 누워만 있다
♧ 초승달 - 윤순호
밭갈이로 다리 풀린 부사리
워낭 소리 몰고 느릿느릿
외양간 드는 저녁
양탄자 노을 지우고
눈웃음 짓는 얼굴
해거름을 산마루 걸쳐 놓고
하안 수건머리 어머니
노곤한 하루를 털고 저녁 지을 때
청명 하늘로
은빛별을 부르는 손짓
남새밭 울타리에
붉은 볏 맨드라미가
미소 거두고 어둠 속에 잠들 때
은하별 자아 놓고
서산 너머 봇짐 푸는 나그네
♧ 미련未練 - 윤태근
은은한 범종 소리 아득한데
한나절 지난 화로의 잿불인가?
손아귀 안의 고운 모래 같아
자꾸 되잡아 보는 미련한 가슴아!
♧ 그려, 그려 - 이강산
-여인숙 달방 1083일
어젠 바빴는데 힘들지 않으셔요. 그려, 그려. 일흔 살 천안 이모의 대답은 딱 두 마디. 물티슈 드릴까요, 호떡 사 올까요, 비도 오고 손님도 없는데 일찍 들어가세요. 그려, 그려.
나는 이모의 그려, 그려가 이모의 삶을 그려보라는 암시 같아서 이모의 어제 손님을, 오늘의 허기를, 내일의 밥상을 내 방에 드러누워 조용히, 더듬더듬 그려 보는 것이다.
♧ 붉은 국물 - 이규홍
짬뽕을 주문하고 나서
국물이 옷에 튈까 봐
앞치마를 두른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붉은 자국
최상의 요리를 내놓겠다는
요리사의 손맛을 믿는다면
깨끗한 그릇 속의 음식은
한 점의 국물이라도
튕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음식을 앞에 놓고
불경한 마음으로
면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붉은 국물은
식탁을 뛰어넘어
나의 급소에 달라붙는 것이다
* 월간 『우리詩』 1월호(통권439호)에서
* 사진 : 요즘 더욱 짙어지는 사철나무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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