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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5. 1. 23.

                                                            *사철나무 열매

 

 

빛과 소금 오명현

 

 

괴산청소년수련원 아침 밥상에

소금 범벅 계란말이가 나왔다

 

누군가는

소금을 알맞게 친 걸 까먹고서 한 번 더 친 거라고 하고

누군가의 건너편에 있던 이는

요리사가 실수로 소금을 흠뻑 쏟아서 그렇단다

그 말을 듣고는 어떤 이가

그럼 계란을 더 많이 풀어서 간을 맞췄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자

어떤 이의 건너편에 있던 이는

우리가 떠나고 나면 그 많은 계란말이를

몇 안 되는 종사자들이 다 먹을 수는 있겠느나고

결국은 음식물 쓰레기로 그냥 버리지 않겠느냐고 한다

 

계란말이가 노란 때깔로 빛나는 것처럼

세상의 말씀들은 명랑하게 부유하는데

소금은 쥐 죽은 듯 누워만 있다

 

 


 

초승달 - 윤순호

 

 

밭갈이로 다리 풀린 부사리

워낭 소리 몰고 느릿느릿

외양간 드는 저녁

양탄자 노을 지우고

눈웃음 짓는 얼굴

 

해거름을 산마루 걸쳐 놓고

하안 수건머리 어머니

노곤한 하루를 털고 저녁 지을 때

청명 하늘로

은빛별을 부르는 손짓

 

남새밭 울타리에

붉은 볏 맨드라미가

미소 거두고 어둠 속에 잠들 때

은하별 자아 놓고

서산 너머 봇짐 푸는 나그네

 

 


 

미련未練 - 윤태근

 

 

은은한 범종 소리 아득한데

 

한나절 지난 화로의 잿불인가?

 

손아귀 안의 고운 모래 같아

 

자꾸 되잡아 보는 미련한 가슴아!

 

 


 

그려, 그려 - 이강산

    -여인숙 달방 1083

 

 

  어젠 바빴는데 힘들지 않으셔요. 그려, 그려. 일흔 살 천안 이모의 대답은 딱 두 마디. 물티슈 드릴까요, 호떡 사 올까요, 비도 오고 손님도 없는데 일찍 들어가세요. 그려, 그려.

 

  나는 이모의 그려, 그려가 이모의 삶을 그려보라는 암시 같아서 이모의 어제 손님을, 오늘의 허기를, 내일의 밥상을 내 방에 드러누워 조용히, 더듬더듬 그려 보는 것이다.

 

 

 

 

붉은 국물 - 이규홍

 

 

짬뽕을 주문하고 나서

국물이 옷에 튈까 봐

앞치마를 두른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또렷한 붉은 자국

최상의 요리를 내놓겠다는

요리사의 손맛을 믿는다면

깨끗한 그릇 속의 음식은

한 점의 국물이라도

튕겨 나가지 않을 것이다

음식을 앞에 놓고

불경한 마음으로

면발을 들어 올리는 순간

붉은 국물은

식탁을 뛰어넘어

나의 급소에 달라붙는 것이다

 

 

                         * 월간 우리1월호(통권439)에서

                         * 사진 : 요즘 더욱 짙어지는 사철나무 열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