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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6)

by 김창집1 2025. 2. 26.

 

 

창살문의 계절 임승진

 

 

창살문 밖으로

쉴 줄 모르는 계절이 지나간다

 

포근한 봄 지나 여름

불타는 여름 지나 가을

서늘한 가을 지나 겨울

천천히 서럽게도 지나간다

 

엄마의 고달픈 세월이 지나갔고

나의 무심한 시절도 지나가고

아이들의 시간 또한 지나가겠지

 

창살문 손잡이 옆 자리에

활짝 핀 단풍잎 서너 장

 

촉촉한 비 오고

선선한 바람 불고

춤추는 함박눈 꿈꾸듯 내려와

빛바랜 문풍지 흔들어 보겠지만

 

창살문에 핀 꽃단풍 몇 잎

해마다 어여쁘게 피어나겠지

 

 


 

족보 임영희

 

 

뒤로 나자빠진 아름드리 고목을

땔감이나 하자고 잘랐다

천수를 누렸으니 호상일 터였다

대대로 새들의 집 임대 사업을

천직으로 살아온 나무는

불립문자의 족보를 안고 있다

공실은 한 채도 없을 만큼

견고한 집을 지어 고객들의

신뢰와 사랑을 받았다

한겨울 허공의 한파는 혹독했다

밤새 쌓인 폭설에 갇혀

도란도란 새끼들 교육이며

배 채울 양식거리도 의논했다

달빛 군불이 사그라지면

몸과 몸을 포개어

언 몸을 덥히며 한겨울을 견뎠다

때로는 태풍에 질려 우는 것들

토닥이느라 밤잠 설치며

굽이굽이 고비도 건넜을 것이다

 

타다닥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한 생이 환한 불꽃을 피우니 올렸다

 

 


 

()과 산책 정지원

 

 

들개들이 싸우는 들녘 눈보라를 본다

 

어느 창문에 비친 추운 아이들

 

나는

계절의 어깨에 올라 길을 걷는다

낙엽이 쌓여 있다

 

어떤 나를 데리고 가는 것인가

 

움직여야 사는 인간과 인간 사이

또 눈이 오고

 

나무는 지탱하기 위해 서 있고

바람에 종종 움직인다

 

땅 위를 천천히 걸어 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미풍

 

이것은 싸움의 끝일까 어디쯤일까

언제 생존은 나를 타오르게 할 것인가

 

나는 끝내 하나의 나무로 남아

몇 개의 땔감으로 떠날 것인가

 

뿌리가 드러난 나무가 공터에 누워 있다

그는 얼어 죽었다

 

차가움을 위해 차가움이 되었다

 

멈추어 서서 그를 건너다 본다

 

우둠지 근처 덮여진 포대에는 친환경 거름이라는 말만 적혀 있다

 

 


 

양파 최경은

 

 

바람은 오랫동안 불지 않았다

 

베란다에 걸린 양파들이 말라 가고

점점 뒤꿈치를 드는 줄기와 뿌리들이 허공을 읽고 있다

 

시한부인 내가 마지막 선택한 거처는 바닷가 낡은 빌라였다

거실에서 베란다를 바라보면 양파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고

나를 갉아 먹던 암세포도 양파처럼

싱싱하게 내 몸을 더듬고 있었다

 

해변 앞 느림보 우체통 속 편지들처럼

죽음이 나를 향해 천천히 도착하고 있었다

 

토마토 스프를 만들어 먹던 일상이 떠오르는

닫혀 있던 여백의 그림자

소란스런 낮을 보냈던 태양이 저녁을 향해 기울어졌다

 

어떤 말도 들을 수 없었던 가장자리가 붉게 타올랐다

 

바다 태양 물새 등대

죽어서도 되고 싶은 것들이 늘어났다

 

나의 무의식이 더딘 걸음으로 옮겨가는 언덕이

어느새 내 앞에 쏟아졌지만

 

진통제를 한 움큼씩 삼킬 때마다

각오도 한 움큼씩 삼켰다

 

뭉개져 쪼그리고 앉은 양파를 화분에 옮겨 심는다

 

 


 

나뭇더미, 생의 은신처 한명희

 

 

아차산을 오르다 숲속 군데군데 쌓인

덩치 큰 나뭇더미를 보았다

 

버려진 나무들이 아닌, 새롭게 짜인 숲의 이야기

 

부러진 가지들이 등지처럼 모여

작은 생명들의 집이 되고

솔가지는 겨울을 녹이는 이불이 되었다

 

흙냄새 가득한 그늘에

숨어든 다람쥐와 곤충들이 잠시 쉬어 가는 온기

 

사람의 손길이 지나간 자리마다

숲은 다시 숨을 고르고

죽음은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었다

 

부러진 것들에도 숨결이 남아 있고

작은 생명들도 생기가 넘쳐

겨울 숲은 쓸쓸하지 않게 되었다

 

그 작은 배려가 짙은 숲이 되고

어느 해든 겨울 숲의 시는 계속된다

 

 

                          *월간 우리2월호(통권 제44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