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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의 시(4)

by 김창집1 2025. 2. 24.

 

 

달의 원근

 

 

달의 한쪽을 차지한 들에는

바닷가 초가집 빈 마당과

큰 소쿠리 하나씩 옆에 끼고

종종걸음으로 가는 아낙네들이

아득한 곡선으로 어른거렸다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이 서쪽으로 이동하면

달에 쌓여 있던 노란 빛들이

여기저기에 마구 부딪힌 뒤

둥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이끼 자란 마음속의 달은

자주 감정의 물결에 휩쓸렸다

기쁠 때는 크게 확대되었고

슬플 때는 작게 축소되었다

 

혼자 길을 걸으며 바라본 달은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듯

가까운 곳에 떠 있었지만

길고 긴 불면의 밤을 보내며

뒤뜰에서 바라본 달은

온화한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내 앞의 바다

 

 

내 앞의 바다는 언제부턴가

잔잔한 모습의 외관을 버리기 시작했다

 

먼 곳에서 자주 불어오는 바람이

가슴의 빈틈에서 스산하게 머무를 때는

어김없이 오랫동안 마구 출렁거렸다

 

때론, 구석으로 밀려가는 걸 거부하며

거친 숨 몰아내는 한 마리 짐승으로

땅을 뚫어가는 기계로 보일 때도 있었다

 

물론 태풍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그 광경들이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이유를 나는 잘 모른다

 

집 뒤뜰에 서 있는 무성한 나무들 때문에

미처 포착하지 못한 바다는 없었을까

 

안개로 뒤덮인 날의 발길 잃는 저녁이나

햇살이 골고루 뿌려진 날의 아침에는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는 짐작이 들었다

 

일부러 정신을 세우고 힘들여 나섰다면

찾아낼 기능성은 결코 적지 않았으리라

 

바닷물이 머리 위로 외롭게 치솟거나

폭포처럼 가슴 밑바닥으로 낙하하는

길고 긴 어두움의 시간이 전혀 아닌데도

 

나는 내 앞의 바다를 못 본 지가 오래다

 

 


 

파도 소리

 

 

  내가 살았던 집은 밤낮으로 수많은 차들이 질주하는 아스팔트길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외출을 끝내고 집에 돌아갈 때마다, 나는 아스팔트길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아스팔트길을 질주하는 버스 바퀴들이 뿜어내는 소리였다 내 영혼을 마비시키는 그 소리는 매일 저녁 여덟 시쯤에 시작되어 자정이 다 될 무렵에야 끝났다 차라리 그 소리가 실제의 파도 소리였다면 나의 숙면을 그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으리라

  버스 바퀴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점을 생각하면서도 한동안 아스팔트길의 파도 소리는 내게 뚜렷하고 부정적인 단편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자연의 경이롭고 아름다운 소리와 철저히 대립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금까지도 아스팔트길의 파도 소리를 평생 원수처럼 증오하는 것은 아니다 아스팔트길의 파도 소리야말로 실제의 파도 소리를 환기하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으므로

 

 


 

장미

 

 

사랑과 정열의 이 붉은 바람을

아무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키가 크지 않아도 공중 끝까지 가 닿고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다

밤에는 혼자 뒤척이지만 낮에는

마을 곳곳을 다니며 대화를 나눈다

메마른 잎을 배척하지 않는

아름다움은 오랫동안 한결같다

빛의 조각들이 쉼 없이 서성거릴 때는

축제의 중심에 앉아

다른 꽃들을 가까이 끌어당긴다

햇살이 섞인 빗방울이 내리면

여기저기에 얽힌 줄기는

금세 푸르고 둥근 잎으로 바뀐다

먼 나라, 어느 무용가의 청춘처럼

 

 

                      *김병택 시집 아득한 상실(황금알, 20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