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두 개의 감옥 – 황현중
편의점 하던 아내가 병원에 갇히면서
아내 대신 나는 편의점에 갇혀 손발이 묶였다
지긋지긋 후텁지근한 칠월의 가마솥에서
펄펄 끓는 두 개의 감옥,
나는 편의점에 갇힌 수인囚人이면서
죄 없이 병원 감옥에 갇힌 아내의 탈옥을 음모하는 공범이다
아내가 먼저 무사히 병원 감옥을 빠져나와야
나도 비로소 편의점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에
아내에게 나는 결국 딜레마적 죄수이므로
하루에 한 번의 면회는 필수요
사식도 특별해야 한다
하나를 요구하면, 1+1를 적용하여 둘을 내밀고
둘을 요구하면, 2+1를 적용하여 셋을 바친다
병원비 걱정에 혹여 상한 몸에 마음까지 다칠세라
배짱으로 돈 찍어 내는 조폐공사 직원처럼
두둑한 지갑을 흔들며 걱정 마라, 큰소리친다
되돌아오는 메아리를 들으며 헛소리 마라, 빈주먹을 불끈 쥔다
하루에 수십 개의 해가 떠서 등을 지진다
시간은 피곤한 시계처럼 느리다
고독할 시간에 삼각김밥이 팔리는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나의 시는 이제 폐기되었다
내가, 시인이 그토록 갈망했던 고요가
정작, 새벽을 쓸어 담는 청소부의 쓰레기통 속에 있다니!
나는 조금식 자주 울어야 했다 하지만,
아내는 웃는다
제 몸 하나 제대로 일으켜 세우지 못하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마음은 벌써 창밖으로 보이는 황방산을 오르고 있다며
웃음에 웃음을 포갠다
아내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놀지 않는 시를 쓸 줄 안다
웃음으로 포장한 아내의 시를 가슴 깊이 안고
나도 함께 웃는다
웃으면 하늘인들 열리지 않겠는가
감옥 문이 열리는 소리가 가깝다
교향악처럼 아름다운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 추억의 느린 그림자 같은 향기의 너에게 – 김미외
하안 수레국화 한아름 안고 돌아오던 밤이었다
천천히 코끝 건너오는 향기가
이제 막 생겨난 초승달처럼
기어이 우물우물 삼켜 버린 너를 데려온다
네게 어울리지 않는 나라고 도리질 치며
깊고 깊게 묻어 둔 마음이건만
짐짓 모른 척
너는 아픔으로 차오르고
속내 들켜 무안한 마음에
애꿎은 국화꽃만 한 잎 한 잎 떼어 내는데
떨어진 꽃잎은 어느새 별로 뜨고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새벽빛 첫 문장을 쓴다
보 고 싶 다
♧ 하늘 오선지 – 김성중
창밖 파란 하늘에
오선지가 걸려 있다
겨울은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 있다
새들이 날아와
음표로 앉으면
투명한
연주가 시작된다
♧ 삼총사 – 김정옥
허물어진 삼층탑이 되었다
두 친구를 잃고 홀로 남아
먼 산만 멀뚱멀뚱 바라보며 삐딱하게 앉아 있다
셋일 때 샘물처럼 넘쳐흐르던 웃음
먼저 막둥이가 어느 날
인사도 없이 떠났다
기댈 언덕을 잃은 엄마가
코로나 후유증 폐렴을 밀어내지 못했다
엄마가 떠나신 며칠 후
노란 리본 같은 은행잎을 본다
옷깃을 여미면서 추위를 느끼는 것도
살아 있으니 가능한 일이겠지 한다
살아 있다는 뜻이겠지 한다
홀로 남겨져
길을 잃은 나그네처럼 깊고 맑은 하늘만 본다
♧ 모과처럼 – 이범철
모과의 한 구석이 검게 타 있다
오래된 햇빛이 스스로를 태우니 눌어붙은 것처럼
둥글고 딱딱한 햇살의 껍질
나무에 매달려 비바람 칠 때마다 흔들리면서도 자존을 잃지 않았다
자수성가한 고아처럼 단단해지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햇살이 잎사귀 젖히고 따라오면 떨림을 멈추고 있는 힘 다해
햇살을 빨던 꼭지의 입술, 오늘은 꽉 다문 채 입에 문 햇살 놓지 않는다
목욕을 마치고 수건을 감았던 살결처럼
깊디깊은 향이 돋아나고 있다
분명 여름날 소나기가 잎사귀 뒤로 들어올 때 깊은숨 들이쉬며
심호흡의 저녁을 맞던 모과
모과를 보면 어린 시절 한 움큼의 햇빛과 한 자락의 바람과 한 숟가락의 밥
고드름을 꺾어 먹듯, 놓치지 않았다
나의 웅크린 등 같은 검은 빛이 자라고 있다
코를 모과의 귀에 대고 지나온 길을 듣고 있다
누군가의 모과는 아니고 내가
나의 모과가 되어 이 겨울 향기가 되어
한 사흘 저렇게 앉아 꿈꿀 수 있다면
* 월간 『우리詩』 2월호(통권 제440호)에서
* 사진 : 요즘 피어나는 변산바람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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