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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혜향문학' 2023년 하반기의 시(1)

by 김창집1 2024. 1. 2.

 

 

                 [문인초대석]

 

 

병산서원에서 보내는 늦은 전언 - 서안나

 

 

  지상에서 남은 일이란 한여름 팔작지붕 홑처마 그늘 따라 옮겨 앉는 일

 

  게으르게 손톱 발톱 깎아 목백일홍 아래 묻어주고 헛담배 피워 먼 산을 조금 어지럽히는 햇살에 다친 무량한 풍경 불러들여 입교당 찬 대청마루에 풋잠으로 함께 깃드는 일 담벼락에 어린 흙내 나는 당신을 자주 지우곤 했다

 

  하나와 둘 혹은 다시 하나가 되는 하회의 이치에 닿으면 나는 돌 틈을 맴돌고 당신은 당신으로 흐른다

 

  삼천 권 고서를 쌓아두고 만대루에서 강학(講學)하는 밤 내 몸은 차고 슬픈 뇌옥 나는 나를 달려 나갈 수 없다

 

  늙은 정인의 이마가 물빛으로 차고 넘칠 즈음 흰 뼈 몇 개로 나는 절연의 문장 속에서 서늘해질 것이다 목백일홍 꽃잎 강물에 풀어쓰는 새벽의 늦은 전언 당신을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문장들이 다 젖었다

 

 

 

 

뒷집 - 문태준

 

 

사람 없는 뒷집

빈 마당은

고요가 나던 곳

 

오늘은 눈발 흩날려

 

흰 털 새끼 고양이

다섯이

뛰는 듯

 

움직이는

희색(喜色)

 

그러나

 

고요를 못 이겨

눈발이 멎다

 

 

*크리스틴 로시프테 그림 '줄서세요'에서

 

 

눈부신 정오 이명혜

 

 

유명식당 대기표 받고 기다리는 동안

청춘이 다 갔나 보다

 

먹고 사는 일 이렇게 중요한 일이었나

되묻고 돌아보고

 

회한으로 주저앉은 자리

생명 우듬지 더듬이로 돋아

 

다시 불쑥 돋는 식욕

봄날 대기표 받았다

 

십이 번 손님 들어오세요

반가워 화들짝 손들었는데

 

하이얀 미음 한 그릇

저승길 안내하고 있더란다

 

 

*도봉산에서 본 서울

 

 

서울 유자효

 

 

서울로 서울로 몰려오던 행렬 따라

나 역시 서울로 와 살아온 지 반백 년

이제는 내 뼈를 묻을

몸의 고향 되었네

 

 

 

 

화왕산 억새 정현숙

 

 

대지에 반짝이는 도포자락 걸쳐 입고

자신을 비운 채 비바람 햇살 함께

화왕산 도인이 되어 나를 불러 세웠다

한낮엔 은빛으로 휘달리던 파도였네

지는 해 황금색 입혀 절정이며 성불이던

가을의 전설이었네, 극락정토 꿈꾸며

 

 

                   * 혜향문학회 간 혜향문학2023 하반기(통권 제21)에서

 

 

*화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