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1] 나는 제주, 너는 여수
♧ 나도 섬이라 – 김정숙
슬픔에 뿌릴 묻으면 아름다운 거라
늘 빤짝이다가도 품으면 먹먹한 거라
제주도 그리고 여수
몸을 더듬는 저녁이라
민낯이라 살가운 가막한 물빛이라
산인 듯 오름인 듯 이심전심 눈빛이라
묻어둔 역사의 그늘 새어나는 불빛이라
내리사랑 치사랑이
내리 반란 치반란이라고
백성을 쥐잡는 데 그만한 총도 없을 거라
모자母子섬 수장한 바다 숨어보는 달빛이라
바다가 거울이라
아른대는 섬들이라
느닷없는 소나기 술상을 뒤엎는 거라
밤바다 적시는 가을이라
무자년 그 가을이라
♧ 남 같지 않아, 여수의 비 – 김미향
사람으로 태어난 게 죄라면 우린 유죄
그 시절에 태어난 게 죄라면 우린 유죄
여주와 제주에 산 게 죄라면 우린 유죄
눈물이 멈추지 않는 제단에 무릎 꿇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그들을 호명하다
할 말을 잃은 풀들은 더 큰 소리로 쓰러졌다
일란성 쌍둥이가 여수에 있었구나
무죄가 유죄가 되고 유죄가 무죄가 되고
지나는 소나기에도 한기가 얼어붙은
침묵 아래로 철커덕 바이크가 지났다
지름길 곁에 두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만성리 위령비 위로
여수의 비
내린다
♧ 누가 마래터널을 지나는가 - 김연미
초록빛 신호 따라 들어가도 될까요
무단 방류된 오염수처럼 한쪽으로 흐르는 역사
예견된 돌발 사고에 풀꽃들만 떨어지죠
정면충돌 위험에서 안전지대를 준비해요
중첩된 시공간이 한 점 빛으로 이어지고
흐름이 바뀔 때가지 기다려도 좋아요
암호화된 기억들을 다 해독할 순 없어요
일방통행 같은 행렬 그 시간을 건너서 온
당신은 안전한가요 터널 끝이 여기에요
♧ 너와 나, 여기 있네 – 강영미
- ‘형제묘’에서
여수, 마래터널 지나 만성리 학살터 넘어
그날과 오늘 사이 여섯 점 말줄임표 사이
나지막 언덕이 되어 너와 나 여기 있네
해방이다 만세 부르던 두 팔들이 여기 있네
모두가 잘 사는 나라 그리던 눈들 여기 있네
죽어도 다시 솟자던 풀들처럼 여기 있네
동포들 죽일 수 없다던 그 입들이 여기 있네
이 땅은 하나라고 올리던 손 여기 있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던 발바닥들이 여기 있네
눈 감은 하늘을 뱉으며 만조의 손을 내밀었지
차라리 나를 쏴라 천 번 만 번 소리쳤지
시퍼런 어머니 가슴 용골 바다가 여기 있네
♧ 나를 닮은 여수 – 신해정
만성리
너를 알고
가슴앓이 심해졌지
낙인의
공포 속에
숨죽이며 살았었지
여수와 내 고향 제주, 흉터마저 똑같다
♧ 노란 등대의 약속 – 조희
바다도 할 말을 잃으면 침묵하는 것일까
그라베로 흐르며 숨죽이는 가막만
따따따 빗방울 소리가 그 바다를 깨운다
활주로가 부서져도 여전히 식민지다
거머리 피를 빨 듯 감각 없이 다가와
형제섬 너를 향해서 총부리를 겨누란다
지킨다는 긴 한 숨 두 숨 물결이 된다는 것
십구 일 저녁 아홉 시 하늘로 부는 비상 나팔
안여*의 노란 등대가 여기에 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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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여 : 제주 남원 바다 지명
*젊은시조문학회 작품집 『빛이 나는 증거품』 통권 제9호(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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