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이 지구상을 두리번거리며 마주치는
나무와 돌과 풀꽃에 엎드리면
사람의 따스한 온기가 피어난다.
12년 만에 엮는 시집이다.
자연과 신화에 깃든 삶의 향기를 채색하는
시 작업 태도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인연들에게 진 빚을 이 시집으로 갚음 될지,
행여 고마운 편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3년 10월 단풍길 고운 날에
김순남
♧ 갯무밥
땅 깊이 파고드는 단단함이 바람 들지 않는
토종무밥
꽃봉오리 볼그랑한 갯ᄂᆞ물*에 얹어 자시며
달다, 맛좋다 하실 때 속으로
거짓말! 했다
덜 익은 푸른 보리 서* 먹기 전에는
한 숟가락이 반타작 되고 마는 고대밥*,
닭도 소화하기 어렵다는 피밥조차 부러웠으니
두루애기수재비* 는쟁이범벅*쯤이야
곤밥이라 부를 때
나는 아주 진저리를 쳤다
밭뙈기 하나 고를 때도
물룻이나 나는 밭이냐 했었지
농사 접는 계절 들이치면
물룻 뿌리라도 삶아먹어야 했으니까
차롱에 담겨 처마를 대롱거리던 보리밥이
이제는 웰빙이라는데
는쟁이범벅, 두루애기수제비가
이제는 약이라는데
그것도 아주 보약이라는데
숙대낭 치렁치렁 휘감아 오르는
하늘래기 꽃 속에
뙈약볕 허리 두르고
발그레 분홍 눈웃음치는 무릇꽃 속에
어머니 애틋한 사랑이 남실거린다
칡뿌리 지겟짐에 거북 모가지 되어버린
아버지 헛기침이 이산저산
칡꽃 향기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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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갯ᄂᆞ물 : 야생무
*서 : 춘궁기에 설익은 곡식으로 지은 밥
*고대밥 : 제주조릿대(ᄀᆞ대) 열매로 지은 밥
*두루애기수제비 : 하늘타리 뿌리를 가루로 만들어 보릿가루 섞어 만든 수제비
*는쟁이범벅 : 메밀나깨 쑥, 고구마 따위를 넣고 만든 범벅
♧ 겨울딸기
몸을 어루만지는 보송한 털이
순한 말 가시로 사는 법을
알아내기까지
세상의 모든 아침은
삶의 저편에서 오고
이편에서 가는 것이어서
안식을 갈망하던 유랑이
훌쩍 떠나면
뿌리 없는 나무처럼 흐느끼다가
숱한 눈발이
푸른 이파리를 덮어오고
한파주의보가 내리고
혹한에 발가락이 저밀 때
영롱하게 무르익는
처음으로
생의 달콤한 오르가즘에 눈시울 붉히다
시원을 넘어 뜬눈으로 달려온
하찮은 것들의
빛나는 깃발이려니
♧ 나도수정초
굳이 잎을 내고
가지를 뻗어 치장하지 않고도
멋스러운,
저것은 분명
무용한 것들을 사랑한 때문이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상처를 기울 때
작은 것들이 내는 노래를
듣는 것이다
숨어서 우는 외로움이
기도처럼 독경처럼
누군가의 흔들리는 길 위에서
안부로 피어나는
꽃
♧ 버먼초
겁 많은 소심쟁이
떨리는 심장 다독이느라
미처 다 돌아보지 못한
딛고 온 발자국마다
곱고 고운 눈물이네
처마 밑 풍경
울리기 위해
고요히 다가서는 바람처럼
아무도 묻지 않는 사랑
푸르름 가득한 대지에
어둑한 곳 찾아 밝히는
오 센티미터 숨어 있는 꽃자루
기어이 엎드려야 보여주는
맑고 투명한 속내
♧ 양하
나라는 이름이
너라는 이름 앞에서
궁극의 길을 묻는다
나는 받기를 원하는데
너는 주기만을 바란다
봄 순을 밥상에 앉히고
못다 핀 꽃봉오리 가을 상에 얹는다
나는 쌀밥으로도 배가 고픈데
너는 피죽마저 게워주려 한다
애증도 참 발칙하다
헌신도 괴로움도 숨기고 숨겨서
남몰래 아랫도리 발그레 적시며
꽃으로 피어나다니
내 어미가 내게 그러하였듯
아픈 손가락일수록 마음 까맣게 궁글리며
쥐눈이콩 같은 열매를 위해
볕살 비껴가는 욱신거림마저
너는 찬란한 고통으로 노래짓는구나
눈길마저 네게는 열독이 되어
화상으로 번질까봐
잠든 아기 내려다보듯
히죽히죽 웃음만 흘리다
저린 무릎 두들기는 것도 잊었다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 (도서출판 각 시선 051,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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