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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1월호의 시(3)

by 김창집1 2024. 1. 24.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 최경은

 

 

  이삿짐을 싸다가 텅 빈 사무실 벽을 바라본다 긁히고 패인 울퉁불퉁해진 벽, 갈라진 벽에 칠이 벗겨져 알 수 없는 낙서들이 새겨있었다

 

  벽을 경계로 집기들이 가려진 밀폐된 공간 속에 비밀스런 말들이 숨어있었다. 사나운 짐승이 되어 서로를 가로막던 벽, 서로 난감한 표정으로 돌아서야 했다

 

  웅웅거리던 말들이 벽을 타고 스멀스멀 구석으로 번진다 다독이며 위로하듯 위선적인 말들이 벽을 키우고 있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책상에 앉아 눈알만 굴리던 사람들, 서로 관심이 없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벽 몰래 은밀히 벽이 되어가는 얼굴들

  침침해진 눈,

 

  눈을 감고 벽을 만졌다

  내가 만져졌다

 

  무엇이 간지러운지

  자신을 가두었던 벽에서 튀어나온 나를 본다

  벽이 나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려리 전선용

 

 

말수가 줄어든다는 건

달관의 문턱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낙하하는 눈발도 한 걸음 벗어나 흩어지면서

앞서간 사람들 틈에 묻어간 바람에

느티나무 잎 향내가 풍겼다

눈이 온들 바람이 분들

나무가 하는 일은 잎 낼 때 내고

질 때 질 뿐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귀 기울여 다 내주는 일

어제는 누가 나무 앞에서 넋두리 했나

벌레 먹은 잎에서 서러운 얘기가 숭숭 뚫렸다

사는 일이 다 그런 거라고

나무는 그늘을 드리우며 등을 토닥인다

폭풍우 몰아쳐도

그러려니

누군가 울다가 간다.

 

 

 

 

자목련 꽃잎이 되어 - 배한조

 

 

겨울 산을 벗어나 거리를 유영하는 사람들

꽃분홍 진달래꽃으로 피더니, 오늘은 벚꽃이 되었다.

어느새 마지막 남은 자목련 꽃잎 하나가

가지 끝에서 떨어질까 말까,

아래를 내려다보며 아슬아슬한 저울질을 하고 있다.

 

매화꽃이 스러져 가던 날 아버지는

병원 응급실로 들어가

세상사 겉치레는 다 벗어버리고

온몸에 새 장식을 주렁주렁 달고

명줄을 잡을까 놓을까

흐릿한 안개속의 나락으로 언제

떨어질지도 모르는

자목련 꽃잎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수액은

가는 비닐관을 타고 저승사자처럼

소리 없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며

허물어져 가는 토담집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황태처럼 건조해지는 혀, 말라가는 의식,

애타게 그리는, 하소연 들어줄 사람 아무도 없는데

꿈결같이 지나치는 백의의 사람들은

물 한 방울의 자비도 바랄 수 없는

로봇처럼 딱딱하고 차디찬 피부를 가졌다.

 

황태 입속에도

순한 바람과 속살처럼 따스한 봄비라도 내려준다면,

그 비에 토담집은 허물어져도

촉촉이 젖은 채 미소 띤 자목련 꽃비로 내려

고개 돌려 뒤돌아보지 않고

저 대지 어느 곳에 고요히 스며들 텐데.

 

 

 

 

잠깐! - 홍해리

 

 

꽃이 욕하는 거 들어 봤냐

풀이 바람 탓하는 것 봤냐

 

비오고 눈 내리고 천둥 친다고

뭐라 하더냐

 

흔들릴 땐 흔들리고

눈물 날 땐 마음껏 울기도 하거라

 

봄이면 새싹 트고

갈이면 열음 하니

 

참고 견디지 않아도

새벽은 오고 바다는 해를 낳는다.

 

 

 

 

민생 김석규

 

 

엊저녁 내도록 비 온다고 해 쌓더니

온통 북새질로 멀금한 하늘 아래

말짱 다 헛것이네 도루묵이네

어느 한 가지 믿을 것 없는 세상 속으로

우산 옆에 낀 사내 궁시렁궁시렁 지나가는

 

 

 

                        *월간 우리1월호(통권42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