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픈 습관
당신은 내게 전화로 헤어지자고 말하고 그 후로 내게는 다른 방식의 이별을 상상하는 슬픈 습관이 생긴다 당신은 사막 가운데서 헤어지자고 말하고 내 발밑에서는 이빨 돋은 모래 고기가 선회하기 시작한다 당신은 어느새 빙산 위에서 헤어지자고 쓴 얼음 편지를 내게 건넨다(메머드의 슬픈 사체) 사막에서도 극지에서도 당신은 처음에 우리가 만났던 때보다 어른스럽고 아름답다 당신은 내게 아무튼 편지 같은 것을 쓴다 그것은 어김없이 내 트레이싱지 같은 피부를 찌른다 폐부에 닿는다 목적지가 있다는 것은 언제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사이에는 기항지가 없어요, 하고 중얼거려 본다 그러나, 그러나 편지의 시대는 이미 끝났고(하늘의 새들이 모두 편지로 변해 추락한다), 우리의 시대 역시 그렇다 얼음 편지가 날아온다 모래의 눈물이 흐른다 편지를 펼치면 그것은 당신이라는 이름의 계단이 되고 편지의 젖은 부분이 깊어지면서 우물이 되고 늪이 되고 이렇게 난공불락의 성채를 쌓고 그 안에 갇히는 것은 누구 탓일까 꿈에서 당신은 언제나 실제의 당신보다 운명적이고, 그러나 편지의 시대는 이미…… 문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 결괴
껴안고 있는 엽서의 앞면과 뒷면처럼 마지막 잎새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나는 두렵다 이 밤이 지나면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되겠지 배달된 엽서는 모든 것을 말해 버리겠지 나는 바람벽의 깊은 곳에 마지막 잎새를 묻는다 바람이 분다 바람벽을 접는다 그 안에 잎새가 있다 더 큰 바람이 들이치고 벽은 언제까지 서 있어야 할까 나는 지친 몸으로 벽 깊숙한 곳에서 마지막 잎새를 꺼내 마른 손에 담는다 마른 손을 소용돌이 모양으로 접어 밀랍으로 봉한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바라지 않는 것) 엽서는 왼손과 오른손의 사슬 같은 악수를 풀지 않고 공중제비의 명멸을 되풀이한다 사자후 속으로 나는 간다 결괴 속으로 나는 간다 엽서는 귀청이 찢어지는 바람의 일갈 속에서 선회한다 금빛 갈기 속의 말은 앙다문 밀랍의 입술을 벌린다 엽서는 모든 것을 말하려 하지만······ 접힌 자국이 없는 바람의 봉투가 찢어진 손을 감싼다 사자후의 봉투, 결괴는 결괴의 형식으로 결괴를 미룬다 외톨이 농아가 골목의 끝을 민다 골목의 끝은 언제까지 지친 몸으로 서 있어야 할까
♧ 물 아래 편지
당신의 잠에 몰래 찾아가 잠든 당신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옵니다 당신이 눈 뜨면 나는 불타오르고 나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서 당신 눈을 피해 수변(水邊)을 거닐거나 당신에게 하고픈 말을 물 위에 적어봅니다 우레는 물 아래 내려가 쉬고 우레는 물빛 봉투 안에서 잠들고 우레를 깨우면 안 돼, 우레를 깨우면 모두 타버리니까, 물 아래 잠든 우레, 중얼거리다가 중얼거리다가 당신이 잠들면 당신 잠에 몰래 찾아가 당신의 속눈썹을 들여다보고 귀밑머리를 살짝 만지고 나는 행복해지면 안 되는 사람인데, 생각하다가
♧ 유원지
대관람차의 형해(形骸)가 방치돼 있다 칠이 벗겨진 말들이 막사 안에서 선잠을 잔다 하늘은 붉게 타오르는데 태엽 장치가 망가진 인형이 편지를 쓴다 돌아앉아 쓰고 있다 뒷모습으로도 편지가 젖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오렌지 향이 날 것 같다 어쩌면 그는, 울고 있는 것일까
♧ 사랑의 폐광
당신에게 쓰는 시는 언제나 나를 다치게 하네 쓰면 쓸수록 나는 죽음에 다가가네 수많은 통점으로 뒤덮인 글쓰기, 편지, 당신에게 쓰는 시…… 나의 수많은 기절!
당신에게 쓰던 이메일은 유령처럼 사라지고 나는 특별한 질감의 엽서에 당신 이름을 새로 적네
당신 이름이 새겨진 몸이, 우표도 붙이지 않은 엽서가 내 앞에 있네
입 벌린 상처들에는 혀가 없고 출산이 없고 묻혔던 보석이 없고
이 방에는 지금 유령들뿐, 지우개를 들고 있는 유령과 미래의 유령들 --쓰게 될 편지와 쓰지 못할 편지들의, 그리고
사랑의 폐광에서 내가 채굴한 당신 이름, 날카로운 펜으로 새긴 문신
나의 첫 줄, 첫 줄이자 마지막 줄, 지워지지 않는 낙인을 검지로 문질러 보네
아, 익숙해지지 않는 질감의 고통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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