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좀딱취
땅 짚고 헤엄치는 일도
네게는 평생이어서
스산한 계절의 뒤꿈치 옆에
몽실몽실 오래 기다려온 꽃봉오리들이
더러 어깃장을 부려서
몇 송이 겨우 피울까 말까지만
엎드려 코를 맞대야 눈 맞추게 되는
셋이면서 하나인
하나이면서 셋인 꽃
세상에서 가장 온전한
대지의 만가라네
♧ 질경이
늘씬한 키에
잘나고 예쁜 꽃 피워내는
힘센 풀밭에서는
이파리 하나 건사하지 못하고
영영 죽고 마느니
차라리
볕 좋은 길에나 가자
오가는 발길마다 온몸이 으스러지게 밟히더라도
나는 다시 일어설
뿌리의 힘을 믿는다
♧ 나리난초
뿔리멍 말멍
썩은 낭껭이나 ᄐᆞ라진 낭섭에
그자 얹혀 겉살암주
욱둑지영 종애도 나위엇이
ᄀᆞᄂᆞᆯ고 ᄀᆞᄂᆞᆯ아
ᄂᆞᆷ들이 곤는 말에
양지는 곱닥허덴 허염주마는
양지 살이 해도 얄루와부난
양갈래 받침대는 멩글아 둬사 허여
이녁들은 향기 쫓아 콧구녕에 힘을 주지만
나사 궂인내 놓으멍
ᄑᆞ리라도 불러 앉히젠
자우러지는 야가기 제우 일으켠
산길을 나삿주게
♧ 노랑제비꽃
너를 만나기 위해
서어나무 잎이 누운 숲길을 지나
내를 건너는 것은
살면서 저도 모르게 낀 땟자국을
닦는 일이다
누가 뭐래도 너는
혹한의 고통을 견뎌내고
고난을 건너서 완성된
순진무구한 사랑이다
지상의 가장 완벽한 숲이라는 세신사에게
무릎 꿇고 엎드릴 때
들이차는 충만이
돌아오는 길을 환하게 한다
그러므로 삶은
강하게 얻는 게 아니라
부드럽고 따스할 때
뿌리가 되는 것이다
♧ 대설주의보
길은 길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폭설보다 100년 만이라는 말에
더 꽁꽁 얼었다
팽나무 잔가지는 바람에 칭칭 감겨
밤새 어둠의 벽을 긁는데
이불 속에서 나는 생라면을 씹는다
슬레이트 낡은 지붕 덕부 씨네 집에서
살점 찢어지는 소리
시린 생살에 사포질하는 파도의
사타구니에서 떨어져 흩날리는
비늘냄새는 무릎뼈에 구멍을 박는다
얼음장 같은 벽에 등짝을 붙이고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책장으로 넘기며
어제 걷던 길에서 풀잎 하나 하찮게 밟았거나
이유 없이 방아깨비 뒷다리를 분질렀거나
목욕탕에서 기진한 할머니의 빤한 시선을 외면했던
낱낱이 되살아나는 죄의 풍경 앞에서
아무래도 잠들기는 글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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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비평 기획위원회(저자)에서 출판한 책 제목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 (도서출판 각시선 051,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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