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중섭
슬프다는 감정을 따라가면 가난한 밥상에 부딪힌다
아이들이 저녁 대신 다리 떨어진 털게를 먹는다
말갈족처럼 눈만 큰 남덕과 아이들
가난한 은화지에서 떠나고
중섭은 눈 안에 화폭을 펼쳐
식칼 같은 사나운 바다를 달래며
뱃길을 오래 뒤쫓았을 것이다
중섭은 이북 사람
잰잰헌* 게들이
아바이 바바이 부르며
평북말로 흩어지는 저녁이다
---
*잰잰헌 : ‘아주 작은’이라는 뜻을 지닌 제주어. 잰잰한 게들이 흐릿하게 중섭의 눈 속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 씨앗론 1
* 숨은 정원
씨앗을 심으면 손톱 밑이 까맣다
손톱을 씻어도 흙이 씨앗을 끌어안고 있다
제주에 사는 어머니
밤마다 내 손톱 위에
서울 달로 뜬다
* 본차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
본차이나
동물의 뼛가루가 섞인
1,200도에서 구운 그릇
동물과 흙과 바람과 불길이
붙잡고 있어 가볍다
그릇을 씻으면
손에서 향냄새가 난다
제주에는 한동네 제사가 모두 같은 날이다
* 7평 고시원, 아마릴리스
이상기온이라던 여름 일곱 평짜리 원룸 고시원 흰 메리야스만 입은 사내들이 벽과 벽 사이 안전모를 썼던 머리와 뜨거운 발바닥을 맞대고 있다 땀이 흥건하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간다 아마릴리스 씨앗들이 힘차게 날아오른다
♧ 애월, 이쾌대*
거제도 포로수용소 철조망도
으르렁거리는 그의 눈빛만은 가둘 수 없었다
물빛 두루마기에
꼭 다문 두툼한 입술로
장황모필 붓 끝에 힘주어
가족에게 편지를 적는다
그림과 그림 도구를 모두 처분하여 아이들을 주리지 않게 해달라
이 편지는 영혼이 높은 모자를 쓰고
전쟁에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하여 쓴 편지였을 것이다
배곯는 아이들이 되지 않기를
식민지 아이들이 되지 않기를
따스하게 꿈꾸는 아이가 되길
붓 대신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수용소 찬 바닥에 돋은
진초록 물감 같은 물이끼가
남과 북으로 나뉜
인민군과 국군 포로수용소
경계를 오버록으로
번져가는 봄날이다
---
*이쾌대 : 근대 사실주의 대표 화가.
♧ 애월3
달을 흔들면 죽은 물고기가 들어 있다
나무 물고기가 내게로 몰려온다
내 눈동자 속에서 검은 비닐봉지처럼 바스락거렸다
모든 슬픔아 눈이 멀거라
♧ 화살나무
배수진을 친다는 막막한 말이 있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사람의
눈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어떤
마음의 무기를 내려놓고
눈 속까지
가득 찬 물길을
등 뒤의
젖은 세계를 버렸을까
당신 등과 가슴에
지문처럼 둥글게
닫히는
도장밥 같은
물무늬
되돌아갈 수 없다
물결의 수위가 높다
*서안나 시집 『애월』 (여우난골, 2023)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의 시(4) (0) | 2024.02.21 |
---|---|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2) (1) | 2024.02.20 |
월간 '우리詩' 2월호의 시(2) (1) | 2024.02.18 |
'한수풀문학' 2023 제18호의 시(3) (1) | 2024.02.17 |
동백문학회 문집 '동백'의 시(6) (1) | 2024.02.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