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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4)

by 김창집1 2024. 2. 19.

 

 

이중섭

 

 

슬프다는 감정을 따라가면 가난한 밥상에 부딪힌다

아이들이 저녁 대신 다리 떨어진 털게를 먹는다

 

말갈족처럼 눈만 큰 남덕과 아이들

가난한 은화지에서 떠나고

 

중섭은 눈 안에 화폭을 펼쳐

식칼 같은 사나운 바다를 달래며

뱃길을 오래 뒤쫓았을 것이다

 

중섭은 이북 사람

잰잰헌* 게들이

아바이 바바이 부르며

평북말로 흩어지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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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잰잰헌 : ‘아주 작은이라는 뜻을 지닌 제주어. 잰잰한 게들이 흐릿하게 중섭의 눈 속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씨앗론 1

 

 

  * 숨은 정원

 

씨앗을 심으면 손톱 밑이 까맣다

손톱을 씻어도 흙이 씨앗을 끌어안고 있다

 

제주에 사는 어머니

밤마다 내 손톱 위에

서울 달로 뜬다

 

 

  * 본차이나

 

제사상에 올리는 밥그릇

본차이나

동물의 뼛가루가 섞인

1,200도에서 구운 그릇

동물과 흙과 바람과 불길이

붙잡고 있어 가볍다

그릇을 씻으면

손에서 향냄새가 난다

 

제주에는 한동네 제사가 모두 같은 날이다

 

 

  * 7평 고시원, 아마릴리스

 

 

  이상기온이라던 여름 일곱 평짜리 원룸 고시원 흰 메리야스만 입은 사내들이 벽과 벽 사이 안전모를 썼던 머리와 뜨거운 발바닥을 맞대고 있다 땀이 흥건하다 낡은 선풍기가 돌아간다 아마릴리스 씨앗들이 힘차게 날아오른다

 

 

*이쾌대  '군상(1948)'

 

 

애월, 이쾌대*

 

 

거제도 포로수용소 철조망도

으르렁거리는 그의 눈빛만은 가둘 수 없었다

 

물빛 두루마기에

꼭 다문 두툼한 입술로

장황모필 붓 끝에 힘주어

가족에게 편지를 적는다

 

그림과 그림 도구를 모두 처분하여 아이들을 주리지 않게 해달라

 

이 편지는 영혼이 높은 모자를 쓰고

전쟁에 상처 입은 아이들을 위하여 쓴 편지였을 것이다

 

배곯는 아이들이 되지 않기를

식민지 아이들이 되지 않기를

따스하게 꿈꾸는 아이가 되길

붓 대신 아이의 손을 잡은 아비의 마음이었을 것이다

 

수용소 찬 바닥에 돋은

진초록 물감 같은 물이끼가

남과 북으로 나뉜

인민군과 국군 포로수용소

경계를 오버록으로

번져가는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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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쾌대 : 근대 사실주의 대표 화가.

 

 

 

 

애월3

 

 

달을 흔들면 죽은 물고기가 들어 있다

 

나무 물고기가 내게로 몰려온다

내 눈동자 속에서 검은 비닐봉지처럼 바스락거렸다

 

모든 슬픔아 눈이 멀거라

 

 

 

 

화살나무

 

 

배수진을 친다는 막막한 말이 있지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사람의

눈과 마주친 적이 있다

 

그는 어떤

마음의 무기를 내려놓고

눈 속까지

가득 찬 물길을

등 뒤의

젖은 세계를 버렸을까

 

당신 등과 가슴에

지문처럼 둥글게

닫히는

도장밥 같은

물무늬

 

되돌아갈 수 없다

물결의 수위가 높다

 

 

                        *서안나 시집 애월(여우난골,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