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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2)

by 김창집1 2024. 2. 20.

 

 

시를 씹는 밤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취한이

전봇대에 기대어 앉아

채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을 쏟아낸다

 

나는 휴대전화 대신 수첩을 든다

 

사람들은 어째서

더럽고 불쾌한 걸

시라고 가르치는지

 

나이 지긋한 악사 흉내를 내면서

왜 자책하는지 혹은 그런 척해야 하는지

그러지 않고

안 쓸 수는 없는 건지

 

병든 노인네처럼 구는 사람의 진실된 조언을

왜 우리는 역겨워하지 않는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저 취한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광등 붉은빛에 휘감겨

길 뒤편으로 실려 간 그가 토했던 말을

 

구겨서 여물처럼 씹어 본다

 

되지도 않는 그 말을 삼키면

울렁거리는 속은 멈출 줄 모르고

요동치고

 

내 시가 누군가의 약봉지가 되든

밑씻개가 되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화마火魔

 

 

화염 앞에 다가서면서 마주한 벽

 

돼지들이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며 질식사하는

혹한의 겨울 새벽

양돈장 화재현장에서 깨단한 그 벽은

 

따뜻하다

환하고 밝은 게

때론 아름답기도 하구나

 

온기로 둔갑한 살기에 취해

그 똥 묻은 벽에 기대어

눈물 콧물 조금쯤 흘린 적 있다

 

휩싸인 연기 속에서

살길을 더듬어가는 소방대원보다는

방송사 카메라 앞에 얼쩡거리는 얼뜨기에

내가 가까웠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따뜻한 화마만은 덮어주었으므로

속삭였으므로

 

한 걸음 물러서, 뒤로 빠져, 그만했으면 됐어

 

하한선뿐인 인생

버틴다는 건 다시 말해

비겁함이라는 밑바닥에 자갈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는 하찮은 자세 같은 것

 

소방차들도 하나둘 철수하고 숯등걸도 긴긴 잠에 빠지는 그곳에서

 

난 무엇과 싸웠나 나 이제와 고백한다

 

불 앞에 서는 것보다

불을 끄고 난 뒤

폐허가 된 현장의 암흑과 추위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나는 진정 나 자신과 싸워본 일이 없음을

 

 

 

 

새연교

     -정수에게

 

 

손잡지 마 옷을 잡아야 살점이 안 무너져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한 발 다가서면 섬 뒤로 숨는 작은 무지개 같은 건 아예 등져버리고 나는 돌아서련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한 아름 안기는 희고 맑은 빛 덩어리 속으로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가족들은 다리 위에서 먼 바다에 저마다 머금던 슬픔을 투망하고

깨진 무지개, 그 파편에 찢긴 옷, 윤곽만 남은 사람을 테트라포드 위로 건져 올린다

 

두 눈을 감는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