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씹는 밤
창밖에 내려다보이는 취한이
전봇대에 기대어 앉아
채 언어가 되지 못한 것들을 쏟아낸다
나는 휴대전화 대신 수첩을 든다
사람들은 어째서
더럽고 불쾌한 걸
시라고 가르치는지
나이 지긋한 악사 흉내를 내면서
왜 자책하는지 혹은 그런 척해야 하는지
그러지 않고
안 쓸 수는 없는 건지
병든 노인네처럼 구는 사람의 진실된 조언을
왜 우리는 역겨워하지 않는지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저 취한은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광등 붉은빛에 휘감겨
길 뒤편으로 실려 간 그가 토했던 말을
구겨서 여물처럼 씹어 본다
되지도 않는 그 말을 삼키면
울렁거리는 속은 멈출 줄 모르고
요동치고
내 시가 누군가의 약봉지가 되든
밑씻개가 되든 아무래도 좋은 것이다
♧ 화마火魔
화염 앞에 다가서면서 마주한 벽
돼지들이 고기 굽는 냄새를 풍기며 질식사하는
혹한의 겨울 새벽
양돈장 화재현장에서 깨단한 그 벽은
따뜻하다
환하고 밝은 게
때론 아름답기도 하구나
온기로 둔갑한 살기에 취해
그 똥 묻은 벽에 기대어
눈물 콧물 조금쯤 흘린 적 있다
휩싸인 연기 속에서
살길을 더듬어가는 소방대원보다는
방송사 카메라 앞에 얼쩡거리는 얼뜨기에
내가 가까웠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도록
따뜻한 화마만은 덮어주었으므로
속삭였으므로
한 걸음 물러서, 뒤로 빠져, 그만했으면 됐어
하한선뿐인 인생
버틴다는 건 다시 말해
비겁함이라는 밑바닥에 자갈처럼 박혀
움직이지 않는 하찮은 자세 같은 것
소방차들도 하나둘 철수하고 숯등걸도 긴긴 잠에 빠지는 그곳에서
난 무엇과 싸웠나 나 이제와 고백한다
불 앞에 서는 것보다
불을 끄고 난 뒤
폐허가 된 현장의 암흑과 추위를
더 무서워하고 있었음을
나는 진정 나 자신과 싸워본 일이 없음을
♧ 새연교
-정수에게
손잡지 마 옷을 잡아야 살점이 안 무너져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한 발 다가서면 섬 뒤로 숨는 작은 무지개 같은 건 아예 등져버리고 나는 돌아서련다
한 발짝만 움직여도 한 아름 안기는 희고 맑은 빛 덩어리 속으로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가족들은 다리 위에서 먼 바다에 저마다 머금던 슬픔을 투망하고
깨진 무지개, 그 파편에 찢긴 옷, 윤곽만 남은 사람을 테트라포드 위로 건져 올린다
두 눈을 감는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도록 망가지지 않도록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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