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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6)

by 김창집1 2024. 3. 27.

 

 

골든타임

 

 

소방관 일여덟이 치어다보는 건

 

6층 건물 난간에 걸터앉아 잠옷 바람으로 고심에 빠진 사람

 

농익어서 두레진 하늘조차 한걸음씩 뒷걸음질쳐버리고

 

그가 아뜩한 델 향해서 넋 놓는 걸

나는 모른 체할 만큼 이 광경은 익숙하다

내일 친구에게

엊저녁의 소동을 미담처럼 늘어놓을 생각에 몸이 달다

 

붉은 벽돌 빌라 끼고 돌면

수평선

태양

연기 속 동료의 뒷모습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내 앞의 연인과

모든 게 끝장나 버리길 바라는 6층 이웃의

시간은 멈추지도 서지도 않고

긴긴 해안도로를 따라 늘어진다

 

고작 낡은 건물 한 채 사이에 두고

어떻게든 갈 건 가고 올 건 온다는 현실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빌라에 고개 숙인 잡초처럼 살고 있다

실핏줄처럼 뻗은 길의 맥박을 걸으며

시간을 죽인다

 

난간에 누가 앉아 있어도

못 본 척할 수 있을 만큼

의젓한 어둠이 들이찰 때까지

 

 

 

 

 

DNR*

 

 

농약 한두 방울이면

집채만 한 짐승을 쓰러뜨릴 수 있는데

입때껏 흘린 눈물

아무것도 적실 수 없단 걸

나는 알지만

 

구순의 노인

손끝 미세한 떨림, 모기 눈물

그 하잘것없는 것에

대쪽 같은 인간은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서

 

어느 일본 만화 비련의 주인공이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미지의 빛을 발하며

불가사의한 힘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바보 같은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싶다

 

입때껏 일궈 온 모든 논밭을 처분해도

주렁주렁 달린 중환자실의 최첨단 장비를

잠깐 작동하게 할 뿐

시한부의 수명은 딱 그만큼만 연장될 뿐이란

사실이 진리처럼 다가오는

 

어른이 될 때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될 때

 

비어져 나오는 무른 웃음을

모른 척해 주는

병원을 나는 들락거리며

 

열대야의 새벽, 타는 목마름이 오면

약처럼 삼키려고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모아

마음속 약병에 담아 두었다

 

---

* DNR : 심폐소생술 거부

 

 

 

 

장지葬地

 

 

눈 한 뭉치 굴려 보냈더니

애면 사람만 더 서러워진다

 

무너져 가는 그를 껴안으면

느린 속도로 능선을 타다가

 

죽은 사람의 굽은 등에 가닿게 된다

 

부삽으로 잉걸불을 건드려 보아도

, 하며 밭은기침 소리 꺼져 가고

 

나는 또 양손으로 나보다 커다란 사람 한 뭉치를 빚어 본다

 

안아 본다 살포시 안으면

허리가 다 젖도록 서로 흐느낀다

 

그리 주고받는 동안 희끗해진 사람은

다 녹아서 해진 갈옷 차림이 되고

 

나는 또 서러워서 얼어붙은 바닥을 삽으로 찌른다

 

, 하며 울지도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흠집이 나서 우는 상이다

 

삽으로 흙을 다지고

흩어진 동백 꽃잎을 손으로 쥐어 본다

 

칼바람은 사람들을 옹기종기 뭉쳐 놓고

동백나무는 여태 불똥을 튀기고 있다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는 이내 미끄러지는

누군가의 무른 손끝이

 

느꺼운 봄의 등허리를 끌고 간다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창비, 2023)에서

                                      *사진 : 불타는 저녁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