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휘어진 LP판
내 몸은 어머니의 판게아
봄여름가을겨울이 죽어나간 수억 년 골짜기들
깊이 패인 주름마다 휘돌아나간 울음을
낡을 대로 낡아 무디어진 바늘로
모든 소리 받아 적는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몸통을
바늘이 출렁거린다
뒤틀린 트랙마다 비틀거리며
툭툭 숨넘어가던 저 불안정했던 맥박들을 뛰어넘어
판게아의 태동을 짚어간다 바다의 몸이 풀린다
그 억겁의 소리들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모든 울음을 재생 중이다
♧ 양지언덕에선 – 정순영
파란 하늘빛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더니
하얀 눈 덮인
양지언덕에선
부룩부룩
봄이 숙성하고 있네
땅의 장독에서
하늘빛 머금은 파릇파릇한 성령의 풀이 돋으면
사슴의 울음으로
새 생명의 해맑은 은혜를 찬송하리
♧ 다양한 당신 - 이인평
죽어 있어도 되는
섣달이었다
당신 하나를 꿈꾸려고
눈이 내리나 보려고
밤을 지탱하는 별빛 같은
불면으로
만화경 속의 당신을
내 마음에다
다양하게 오려 붙이는 동안엔
죽음도 달아났다
그러므로, 죽지 않았으므로
홀로 길을 잃은 듯
섣달은 길었다
겨울을 뚫고
복수초처럼 눈 속에서 빠져나와
마주 볼 생각이었지만
그토록 다양했던 당신은 어느새
그믐달같이 사라졌다
그래도 괜찮은 꿈이었다
♧ 생사는 순간이었다 - 조성례
실수의 끝은 너그럽지 않았다
물인 줄 알고
섬유탈취제를 뿌리서부터 잎까지 뿌렸다
검색 창에 떠 있는
설탕에 마늘에 쌀뜨물에
마음속으로는 미안해를 줄줄이 외면서 먹였다
어머니는
배앓이 하는 내게 쌀뜨물을 끓여서 먹였다는데
마지막 한 잎까지 시들어버리나 아슬했더니
어느 날 잎맥에 힘이 생기기 시작했다.
날짜를 짚어 가며 쌀뜨물을 먹였다
하얀 밥풀이 달리고
또 새로운 혹이 생겨났다
무엇일까?
날개를 달 준비를 시작했다
안타까운 내 마음을 행여 들었을까
꽃대 두 개를 밀어 올리고 있다
오늘은? 내일은?
파드닥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기다리는 마음
오늘은 1미리 아님 2미리
꽃대의 길이를 눈 속으로 가늠한다
*월간 『우리詩』 3월호(통권 제429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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