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골든타임
소방관 일여덟이 치어다보는 건
6층 건물 난간에 걸터앉아 잠옷 바람으로 고심에 빠진 사람
농익어서 두레진 하늘조차 한걸음씩 뒷걸음질쳐버리고
그가 아뜩한 델 향해서 넋 놓는 걸
나는 모른 체할 만큼 이 광경은 익숙하다
내일 친구에게
엊저녁의 소동을 미담처럼 늘어놓을 생각에 몸이 달다
붉은 벽돌 빌라 끼고 돌면
수평선
태양
연기 속 동료의 뒷모습
이 순간이 영원하길 바라는 내 앞의 연인과
모든 게 끝장나 버리길 바라는 6층 이웃의
시간은 멈추지도 서지도 않고
긴긴 해안도로를 따라 늘어진다
고작 낡은 건물 한 채 사이에 두고
어떻게든 갈 건 가고 올 건 온다는 현실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나는 이 빌라에 고개 숙인 잡초처럼 살고 있다
실핏줄처럼 뻗은 길의 맥박을 걸으며
시간을 죽인다
난간에 누가 앉아 있어도
못 본 척할 수 있을 만큼
의젓한 어둠이 들이찰 때까지
♧ DNR*
농약 한두 방울이면
집채만 한 짐승을 쓰러뜨릴 수 있는데
입때껏 흘린 눈물
아무것도 적실 수 없단 걸
나는 알지만
구순의 노인
손끝 미세한 떨림, 모기 눈물
그 하잘것없는 것에
대쪽 같은 인간은 무너지고 만다는 사실을
나는 알아서
어느 일본 만화 비련의 주인공이 흘린
눈물 한 방울이 미지의 빛을 발하며
불가사의한 힘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바보 같은 어릴 적으로 돌아가고 싶다
입때껏 일궈 온 모든 논밭을 처분해도
주렁주렁 달린 중환자실의 최첨단 장비를
잠깐 작동하게 할 뿐
시한부의 수명은 딱 그만큼만 연장될 뿐이란
사실이 진리처럼 다가오는
어른이 될 때
울어도 소용없다는 걸 알게 될 때
비어져 나오는 무른 웃음을
모른 척해 주는
병원을 나는 들락거리며
열대야의 새벽, 타는 목마름이 오면
약처럼 삼키려고
눈물을 한 방울 한 방울 모아
마음속 약병에 담아 두었다
---
* DNR : 심폐소생술 거부
♧ 장지葬地
눈 한 뭉치 굴려 보냈더니
애면 사람만 더 서러워진다
무너져 가는 그를 껴안으면
느린 속도로 능선을 타다가
죽은 사람의 굽은 등에 가닿게 된다
부삽으로 잉걸불을 건드려 보아도
큭, 하며 밭은기침 소리 꺼져 가고
나는 또 양손으로 나보다 커다란 사람 한 뭉치를 빚어 본다
안아 본다 살포시 안으면
허리가 다 젖도록 서로 흐느낀다
그리 주고받는 동안 희끗해진 사람은
다 녹아서 해진 갈옷 차림이 되고
나는 또 서러워서 얼어붙은 바닥을 삽으로 찌른다
큭, 하며 울지도 못한 사람은
죽어서도 흠집이 나서 우는 상이다
삽으로 흙을 다지고
흩어진 동백 꽃잎을 손으로 쥐어 본다
칼바람은 사람들을 옹기종기 뭉쳐 놓고
동백나무는 여태 불똥을 튀기고 있다
내 목덜미를 어루만지고는 이내 미끄러지는
누군가의 무른 손끝이
느꺼운 봄의 등허리를 끌고 간다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 (창비, 2023)에서
*사진 : 불타는 저녁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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