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습성
길바닥에 떨어진 내 나이 또래
오백 원짜리 동전 앞에 멈춰 선다
이젠 이런 게 기쁘지가 않아
예전의 내가 아니거든
애써 말해 보지만
주울까 말까 누가 먼저 줍진 않겠지
걸음을 떼는 척 발로 짓이긴다
학창시절을 줄곧 괴롭혀 온 건
꼭 서너 푼씩 모자라는 애매한 생활비보다도
이런 빈곤에 익숙한 나머지
하잘것없는 것에 깡마른 몸을 움츠려
자발적으로 승복해버리는 습성 아니었나
종합상가 유리벽 앞에 엉거주춤 선 나를 마주할 때
짓밟혀도 붙어먹어야 산다 살아남는다
바닥에 해진 마음 하나
손으로 훔쳐내려다 놓치자
납작한 새 울음소리가 들린다
왜
아무도 안 쳐다보는데
마음은 바퀴를 달고 저만치로
미끄러지듯 도망쳐버리는가
왜
나는 항상 몇 걸음 뒤늦게
도착하는 급급한 종종걸음인가
♧ 5월 8일
꿈에서 만난 아버지
온몸에 산탄총을 쏴
화사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장미 한 송이 꺾어
어머니 가슴에 달아드렸습니다.
집을 나올 땐 잊지 않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요란하던 기척은 멀어집니다.
빛이 쏟아집니다. 온통 시든 백국뿐입니다.
한 다발 뭉쳐 저녁바다에 던졌더니
난분분하는 화환 사이로
윤슬에 떠밀려오는
어김없는 아버지
♧ 애월
지난겨울을 떠올리던 여름
달리던 버스가 급정거했다. 총성이 뒤미처 울렸다.
깨진 유리에 묻은 성에를 닦고 동상 걸린 손을 바다에 담갔다.
눈바람에 흩날리는 네가 칼에 찔린 채 웃고 있었다.
그대로 두고 싶었는데
종점이었다.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사람 시인선 108, 2024)에서
'아름다운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8) (1) | 2024.04.04 |
---|---|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의 시(9) (1) | 2024.04.03 |
서안나 시집 '애월'의 시(8) (0) | 2024.04.01 |
월간 '우리詩' 3월호의 시(5) (1) | 2024.03.31 |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의 시(7) (0) | 2024.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