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천 대섬에서
짙푸른 바다에 하얀 눈이 내리고
괭이갈매기 떼 바람의 옆구리를 간질일 때
어린 고기는 비늘을 털며 뛰어오르곤 합니다
파도만 무심히 왔다가는 바닷가에서
카 오디오에 테이프를 넣고
사이먼 카펑클의 “메리워즈 언 온리 차일드”를 들으면
희미한 시간의 껍질이
맨몸으로 달려듭니다
살면서 때때로 낫을 갈 듯이
자신을 버리는 일도
지상의 모든 이름들을
사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나는
바다의 물이랑마다
그리운 편지 나르겠습니다
♧ 변비
가만 두면
제풀에 미어져 나올 것을
이마에 힘줄이 터져라 용을 쓰다가
일어서면서
에이 시팔,
저만치 바삐 걷는 벗의 뒤꿈치에
양! 잠깐만 기다립서 외쳤다
공중화장실보다 숲이 더
편하게 술술 밀려나오는 것을 보면
나는 필경
어느 들짐승의 후생으로
살고 있는가 보다
♧ 화단의 잡초
낮에는 바다의 몸짓을 불러들이고
밤이면 산의 심장소리 떼어다
하늘매발톱 비비추 작약 왕원추리 청국들
꽃물 놓은 자리마다
지하철 좁은 의자에 쩍벌남처럼
잡풀이 돋았다
이빨보다 사납게 손톱을 앙다물었다가 문득
이 무슨 억하심정인가
자식도 애물단지인 때가 있는데 싶었다
물건 같지 않은 것들이
효자노릇 한다더니
어머나, 꽃을 피웠다
어깨를 내어준 산박하와 돌콩이다
화단이 풍성하다
선택받은 종자들 이파리에 흙탕도 없다
이 가을엔 5층 건물 옥상에서
풀벌레들 달빛소나타 들을 수 있겠다
*김순남 시집 『내 생애 아름다운 인연』 (도서출판 각 시선 051,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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