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흘러가 버렸다 국지성 호우가 쏟아졌다 가방도 마음도 젖었다 가지고 다니던 네 편지를 펼치자 오로라의 악보가 나왔다 네가 어른이 되어가는 모습을 언제까지라도 보고 싶었는데 이제 너는 없다 언젠가 학교 앞에서 만난 너는 큰 기타를 메고 있었다 네가 음악을 하는지 전혀 몰랐다 나는 강의실로 가고 있었다 너는 방금 쓴 노래를 들려주겠노라고 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이 낯설어서 “나중에, 나중에”라고 했다
♧ 체리 향기
이란 영화제에서였다 “친구를 돕는 방법에는 필시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죽으려는 남자에게 한 노인이 자기의 경험을 들려주는 유명한 장면에서 한 말이다 노인도 목을 매어 죽으려고 숲까지 갔지만 체리 향기가 풍겨 와서 죽을 수 없었다고, 체리를 한 알 두 알 세알 자꾸 먹다보니 살고 싶어졌다고
외톨이 신(神)이 편지를 띄운다 우리는 받을 수 없고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편지이다 ‘체리 향기’에는 자기가 판 구덩이에 들어가 눕는 남자가 나온다 어떤 위로도 그를 살게 할 수 없다 체리 향기는 여전히 말 풍선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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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바스 키아로스타미 ‘체리 향기’(1997)
♧ 졸업
너는 그것을 몰라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에게 주려던 편지를 흐르는 강물에 버린 것을 네가 알까 너는 모르지 그것은 흐르고 흘러 지하세계에 이르고 지하세계 구중궁궐의 아흔아홉 겹 그늘 속으로 가게 돼 머리가 둘, 팔이 넷인 괴이(怪異)가 힘이 센 괴이가 그곳을 지켜서 그곳을 지켜서…… 끝까지 너는 네가 모른다는 것을 모르지 내가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나는 앞서고 너는 내 뒤를 따르고 나는 가르치고 너는 배우고 그런 평범한 날들이 있었지 너를 보지 않겠다고 한 건 보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는 손끝에 매단 실을 놀리고 나는 인형처럼 꽃처럼 흔들린 날이 있었지 네가 떠나면 나는 무엇이 될까 너는 손가락으로 가리켰지 내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뉘앙스의 구름을
*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시선 495,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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