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의 말
알맹이는
어디 갔나?
껍데기만
무성한 봄날
애기동백
목을 떨군
올레, 올레
톺아가며
씻김의
해원상생굿
그 축문을
외고 싶다
2024년 봄
임채성
♧ 제주 동백
바람에 목을 꺾은 뭇 생령이 나뒹군다
해마다 기억상실증 도지는 봄 앞에서
상기된 얼굴을 묻고
투신하는 붉은 꽃들
죽어서 할 참회라면 살아서 진혼하라
산과 들 다 태우던 불놀이를 멈춘 섬이
지노귀 축문을 외며
꽃상여를 메고 간다
♧ 올레를 걷다
걸음발이 무직하다
순례인 듯 답사인 듯
무너진 산담 앞의 풀꽃들과 눈 맞추며
4․3조, 때론 3․4조로 돞아가는 제주 올레
총탄 맞은 자국일까
창칼에 찔린 상처일까
온몸에 흉터를 새긴 현무암 검은 돌담
섬 휩쓴 거센 불길에 숯검정이 됐나보다
오름을 감아 돌다
바다로 틀어진 길
바람이 봄을 밀고 골목 안을 배회할 때
팽나무 굽은 가지가 살풀이춤 추고 있다
♧ 사월의 환幻
한라산 털진달래 핏빛 뚝뚝 떨구는 날
삼보일배 걸음으로 사월 올레 걸어본다
조랑말 간세다리가
게름 한껏 피우는 길
돌하르방 퉁방울눈 이슬에 젖어 있다
성산포 터진목에서 북촌 너븐숭이까지
밟혀도 일어선 풀들 증언하듯 도열하고
잊어라, 잊어라 해도 어제처럼 생생한 밤
오름 아래 마을들이 달집처럼 태워지고
산에 간 이웃삼촌은 거적에 싸여 돌아왔다
백발의 삘기꽃이 산담 앞을 지키고 선
통점의 언저리를 숨죽이며 더듬을 때
봉인된 기억의 빗장
시나브로 풀어진다
*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고요아침,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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