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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의 시(8)

by 김창집1 2024. 4. 7.

 

 

미장

 

 

아버지가 아무도 나갈 수 없는

미로를 만들어내는 동안

 

가도 가도 끝없는 복도를 헤매면서

나는 망치를 들고 앞을 부쉈다

 

하루에도 몇 군데를 돌면서

깨진 벽에 시멘트를 바르는 아버지

 

얼마나 많은 실금을 문질러야 미로가 완성될까

 

미로를 만들다 미로에 갇힌 둘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서로를 탓하며 부수고 세우고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지워지지 않기 위해 벌어진 곳을 메우는 동시에

, 사이에 움을 틔웠다

 

틈이란 말엔 가득 차서 넘치는 실뿌리가 자랐다

뻗어도,

또 뻗어도 벽과 마주하는

 

출구를 찾다가 둘은 자꾸 얽매였다

 

빠져나온 잡초 위에

흙을 다지던 그의

 

건너편에서

실금처럼 앙다문 입을 하고

못과 망치를 쥐던

 

내겐 그런 복도가 많아서

 

 

 

 

자율학습

 

 

가정통신문에 적힌 수학여행 경비

490,000

내지 않으면

 

빈 교실에서 공부해야 한다

어디에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수업은

남겨진 사람의 몫

 

기죽은 자식 달랜다고

어머니는 동네 곳곳을 누비며

꿔온 490,000원을 봉투에 넣어

손에 쥐여 주셨지

담임 선생님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만 했다

 

0 하나만 더 붙이면 되는데

0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인데

 

그깟 게 뭐라고

사과를 받는지

 

급식소에 앉아

뭉칫돈을 꺼내

국에 말아 먹는다

 

배가 부른데도 욱여넣는다

아플 때까지

벌한다는 마음으로

 

그건 먹어선 안 되는 것이고

삼킬 수도 없는 것인데

 

 

 

 

승희 미용실

 

 

엄마가 아빠에게

죽도록 얻어맞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맛이 이게 뭐냐며 던진 국수 그릇을

뒤집어쓰고 그녀는

쏟아진 골목길을 탁한 국물처럼

걸어갔습니다

 

나는 아빠가 쫓아가지 못하게

손에 쥔 벼리 칼로

길목을 썰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경호 엄마네 미용실에 들러

머리에 뒤엉킨 국수 가닥들을

세면대에 풀어내곤 헀습니다

 

한번 들어갔다 하면

몇 시간이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고

간판에 불이 꺼집니다

 

그리고 굵은 빗방울

 

퉁퉁 불은 기억들이

갑자기 잘리기 시작합니다

 

방금 올라온 국수 앞에서

 

식탁 아래 식칼을 감추고

아빠 옆에 앉아

 

뜨거운 국물을 호호 불면 나는

안개를 헤쳐 저벅저벅 미용실로 향하는

어슷한 젓가락이 됩니다

 

 

             * 문경수 시집 틀림없는 내가 될 때까지(걷는사람, 2024)에서

                                          *사진 : 네 개의 욕망(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