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썹, 말모래기
눈썹을 짙게 그려도
나는 쓸모없는 무늬
말모래기
사랑을 손과 얼굴로 만드는 사람
식물처럼 밤을 만드는 사람
쓸모없는 것들은 먼지 냄새가 난다
부서진 유리조각
버려진 비닐
녹슨 총과 동맹과 국경
시든 꽝꽝나무
박스에 담겨 버려진
눈도 뜨지 못한 따스한 강아지
오랜만에 잡은
낡은 기타처럼
반짝이는 먼지로 솟아오르지
눈썹을 치우고
떠도는 밤이 되는
경계를 삼키는
---
*말모래기 : 언어장애인.
♧ 난각 코드
4
달걀껍데기에 찍힌
숫자 열 개
그중 열 번째 숫자는
닭을 사육하는 케이지 크기이다
A4 용지만 한
닭장에 사는 닭이 낳은 달걀
빵공장 다니는
내 고등학교 친한 친구
컨베이어벨트에서 숨 가쁘게 흘러나오는
빵을 포장하고
야근마치고 보내준 생일 선물
택배상자에 빵이 종류별로 들어있다
한 입 베어 먹으면
달콤하다 계란 냄새가 난다
해병대 출신 근육질 젊은 녀석들도
하루 일하고서 도망간다는 회사에서
친구는 날개를 접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둥글고 따스한 빵을 낳는다
양치를 하다 보았다
내 혀에 찍힌 4
아름답고 상냥한 사회 판별법
물에 담갔을 때 둥둥 뜨는 노동자의 발
껍질을 깼을 때 흰자와 노른자가 퍼지거나 노른자 형태가 사라진 정부
흔들었을 때 소리가 들리는 CEO
유황 냄새나는 은행
♧ 애월, 이공본풀이
흰 소 타고
열다섯 전에 죽은 동자들과
환생꽃 들어 서천꽃밭 간다
서천꽃밭 가다 보니
무릎에 가시덤불 닿아 가시덤불 지나고
허리 태우는 불길 있어 그 불길 넘고,
목이 잠기는 물길 있어 그 물길 넘으니*
서천꽃밭에 억울하게 죽은 넋들
신축년 항쟁에 죽은 넋들
배곯아 죽은 영혼들
눈앞에서 아비 어미 목숨 붙잡지 못한 넋들
죽은 어린 자식 끌어안고 울던 넋들
바다에서 수장되어 죽은 넋들
머리 잘라 서천꽃밭 청대밭에 던져두고
허리 잘라 흑대밭에 던져두고
무릎 잘라 청띠밭에 던져두었구나*
삼승할망이여
꽃감관 도령이여
꽃마다 골짜기마다 바람마다 좌정한
일만팔천 신들이여
광천못 다섯 가지 못물 넋 위에 뿌리옵네다
도환생꽃, 뼈오를꽃, 살오를꽃, 웃음웃을꽃, 숨오를꽃, 피오를꽃과
때죽나무 회초리로 세 번 내려치옵네다
억울하게 죽은 넋들이 노래하며 깨어나네
서천꽃밭 환생꽃으로
죽은 저승 목숨 불러내니
오곡 곡식 씨앗이 만발 번성하고
동쪽바다에서 흘러온 돌함을 열면
세 공주가 소와 말과 곡식을 안고 나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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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무속자료사전』(개정판) (각, 2007), 112-114면 이공본풀이 변용.
* 서안나 시집 『애월』 (여우난골,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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