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사월에
동백 지는 봄을 맞는
섬은 늘 겨울이다
멍이 든 잎새마다 고개 숙인 사월 앞에
연북정 옹성 축대가
북쪽으로 기운다
대답 없는 안부 같은 목청만 가다듬다
가납사니 뜬소문에 주저앉은 산과 오름
뭍 향한 무언無言의 절규
파도마저 목이 잠기고
오천만이 절을 하면
하얀 목련 촛불을 켤까
태풍에도 지지 않을 꽃 한 송이 기다리듯
고사리 어린 상주가
조막손을 모은다
♧ 4월, 동백동산
하르방은 피라 했고, 할망은 불이라 했다
추깃물에 목을 적신 까마귀 혓바닥처럼
울 아방 산담을 따라
비명처럼 지는 꽃들
붉은 꽃잎 어디에나 검은 멍이 들어 있다
그 겨울 시반屍斑 같은 들고양이 호곡소리
곶자왈 야만의 숲이
바람도 없이 출렁인다
화산도의 눈물인 듯 마르지 않는 먼물깍*
벙글다 진 꽃봉오리 두 손으로 받쳐 들면
봄볕에 말문이 트인
동박새가 홰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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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 조천읍 선흘리 동백동산의 가장 큰 습지.
♧ 백록의 눈물
백록!
백록!
부르다 보면 가슴께가 젖어든다
날 세운 바람 앞에 안으로만 삼킨 눈물
뿔 꺾인 사슴 한 마리 산담에 갇혀 산다
백 번은 올라서야 흰 사슴을 본다던가
잡풀은 스러지고 민머리로 남은 봄을
천 번에 천 번을 와도 볼 수 없는 사람아
비울 것 다 비워서 하늘마저 궁근 사월
산철쭉 송이송이 붉은 혀 빼어 물면
활화산 분화의 기억 잠든 산을 깨운다
움푹 팬 정수리를 내리치는 천둥소리
까마귀 목쉰 울음 산을 타고 흘러내릴 때
눈 퉁퉁 고사리마가 눈물 왈칵 쏟고 있다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 (열린시학, 202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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