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이
너에게 보낸 편지는 가서는 벌써 몇 해째 감감 무소식이다 마지막 문장의 종지부 너머 살풍경에서 너는 눈의 여왕의 차가운 키스에 발갛게 달아올라 나를 까맣게 까맣게 잊었나 보다 너는 내가 보낸 편지의 그 낱말들을 모조리 흩어놓고 사람의 말로는 도무지 조합할 수 없는 불가능한 낱말을 찾느라고 아마 바쁜 모양이다 저 빛도 가지 못하는 살풍경에서 낱말 퍼즐 놀이로 아마 되게는 바쁜 모양이다
♧ 저 멀리
파 프롬*
“나 혼자 연습해서 이만큼 탈 수 있게 됐어 앞으로 일요일마다 자전거 타고 놀러 갈 거야 어디든 마음대로 갈 수 있어 다음 학기엔 자전거 타고 등교해야지 수업 빼먹고 서문정에서 영화도 봐야지…… 있잖아, 내가 얼마나 자전거 배우고 싶었는지 넌 알지?…… 자전거 타게 되면 어디든 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어”**
누가 나를 먼 곳으로 데려가 주나, 나는 또 누구를 멀리 데리고 가서 혼자가 되나
유령
내 심장 속에는 호우(豪雨) 호우 벌레가 살아서 나는 머지않아 죽으리라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는 쓰레기통에 버린다 가끔 시가 병을 낫게 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궁금해진다 나는 의사 앞에만 가면 어디가 아픈지 잘 말할 수 없다 꾀병이 아닌데 이 아픔을 어떻게 말해야 당신이 믿을까
로스트 인 스페이스
밤이 깊으면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다시 알기 위해 잊는다 살갗에 망각의 극피(棘皮)가 돋은 어둠이 된다 바다 밑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는 달빛만이 꿈인 듯 옛날인 듯 내 뒤를 따른다 먼저 자요 먼저 자요 당신, 편지를 쓰면서 나는 차츰 알게 되리라 편지를 받게 되리라 여드름도 가라앉고 아름다운 주름도 생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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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의 소제목은 짐 자무시 감독의 옴니버스 영화 「미스터리 트레인」(1989)의 세 에피소드 제목 ‘파 프롬 요코하마’ ‘고스트’ ‘로스트 인 스페이스’를 차용함
** 옴니버스 영화 〈광음적고사(光陰的故事)〉(1982) 중 에드워드 양 감독의 ‘지망(指望)’ 편
♧ 책갈피
kryplonlte
당신과 함께였을 때 저는 스무 살이었고 어느 날 깨어보니 서른 살이 되어 있었어요 친구들이 편지를 읽어주러 왔어요 우리가 주고받은 편지를…… 시간이 저를 비눗방울 불듯 불어댔어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어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바람,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한숨…… 우리는 항상 광주로 되돌아가지만 광주를 졸업할 수는 없어요 노란 우산을 쓴 인파 그리고 피 흘리는 소녀 피 흘리는 양곤, 블루사이공, 꽃잎 꽃잎 사랑의 시간, 우리가 완전히 잃어버린 것이 있는 곳
*장이지 시집 『편지의 시대』 (창비, 2023)에서
*사진 : 산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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