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형의 눈물
커튼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먼지와 뒹굴며 키스를 하고 있다
삐걱거리는 흔들의자에서 귀 없는 노파가 흔들흔들 졸고 있다
흔들의자는 왈츠 풍으로 방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방 안 한쪽 구석에 거대한 침대 위에 바비인형이 누워있다
인형은 거대한 공장에서 사지가 마비된 채로 태어났다
바비인형은 붉은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매일 아침 문틈 사이로 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노파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게 바비인형의 귀를 잘라주었다
인형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침대 위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다
노파는 인형을 깨끗이 씻기고 매일 가장 아름다운 블라우스를 입힌다
방 안 구석에 웅크려 있던 어둠이 바비인형의 콧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뒤 문틈 사이로 흘러온 햇살이 인형의 콧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인형의 몸은 풍선처럼 가벼워진다
거리가 어둠으로 재워지고 달빛이 비치면 바비인형과 거대한 침대는
하늘 속을 날아다녔다
햇살이 절름거리며 방안에 다다르면 인형의 몸속에서 뿌리가 생기고
나무줄기가 자라나고 잎사귀가 매달렸다
가끔 열매가 맺히고 향긋한 꽃이 피기도 했다
바비인형은 단단한 나무가 되었다 방한은 거대한 숲이 되어간다
노파는 서둘러 거대한 숲을 불태웠다
인형은 차가운 눈물을 홀린다
불에 타 날 수 없는 수많은 나비들이 노파의 몸을 짓눌렀다
노파의 행동은 어떤 알 수 없는 오래된 종교 의식처럼 이상했다
안개가 문틈 시의로 흘러오면 가끔 사지가 마비된 바비인형은
몽유병 걸린 것처럼 어두운 거리를 돌아다녔다
바비인형은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매일 침대 위에 누워있다
귀 없는 노파는 흔들의자에서 여전히 흔들흔들 졸고
가벼운 먼지들만이 인형의 몸을 누르고 인형은 거칠게 숨을 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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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 ‘오페라의 유령’에서 주인공의 대사.
♧ 산타클로스 죽이기
눈이 거칠게 내리던 날 산타클로스를 죽였다 창문으로 넘어오는 강도인 줄 알고 목 졸라 죽였다 산타를 서둘러 텃밭 사과나무 밑에 묻었다 썰매를 끄는 사슴들은 얼어붙은 계곡으로 떨어졌다 아이들에게 산타가 아파서 이번 겨울엔 찾아오지 않을 거라 둘러덌다 아이들은 붉게 흔들리는 내 눈동자에서 거짓말을 알아챘다 아이들은 더는 꿈을 꾸지 않았다 빨간 양말을 창문 옆에 놔두지도 않았다 아름다운 눈도 내리지 않았다 세상은 온통 공허한 안개로 채워졌다 아이들은 수없이 눈을 깜박거리고 말을 더듬었다 이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소리들이 유리처럼 부서지며 침묵은 낙엽처럼 쌓였다 급하게 전조등을 깜빡거리는 치들이 부딪쳐 도로 위를 함박눈처럼 뒹굴었다 겨울은 찾아오지 않았다 겨울이 오지 않으니 봄도 오지 않고 봄이 오지 않으니 여름도 오지 않는다 가을도 오지 않는다 지구는 거대한 유성처럼 불탔다 태양계에서 태양은 결국 두 개가 되었다 아름다운 지구를 되찾기 위해 난 서둘러 산타클로스가 돼야 했다 모든 것을 되돌려놓고 싶었다 산타가 되는 방법은 사과나무에 달린 사과를 먹는 것이다 먼저 죽은 산타와 같이 묻어둔 그림자를 꺼내 내 가벼운 영혼 속에 집어넣었다 하늘 속에서 사과들이 투명한 빗방울처럼 쏟아졌다 길가에는 수많은 붉은 사과들이 굴러다녔다 아이들은 사과를 허겁지겁 주워 먹고 호랑나비가 되었다 나비가 된 아이들은 사슴 대신 그해 겨울 내 썰매를 끌었다 썰매는 내가 깊은 잠에서 깨어 날 때마다 울었다
나는 어두운 밤 골목 의자 위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지나가는 경비원이 내게 이 모든 것은 꿈이에요 라고 말한다 산타가 이 거리를 지나갔는데 보지 못했나요 아이들은 산타를 기다리고 있는데 아직 선물을 받지 못했거든요 하며 숲속으로 사라졌다 기울어진 가로등 불빛이 차가운 공기 위에 낙엽처럼 쓰러졌다 산타는 죽지 않았나요 사슴들은 어떻게 됐나요 난 흐느끼며 울었다 나비들이 가득 찬 골목을 지나 흩날리는 눈송이처럼 어두운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아침 동굴 같은 집과 그 속으로 들어간 사람이 아무 흔적 없이 사라졌다 환한 빛만이 서늘한 물처럼 그 자리에 고여 있었다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 (시와세계, 2023)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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