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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7)

by 김창집1 2024. 5. 8.

 

 

익지 않은 고구마

 

 

어머니는 솔잎 같은 손으로 기다란 고구마를 세숫대야 가득 넣어

씻고 있다. 난 그 옆에 고구마 같이 쭈그려 앉아 졸린 잠들을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 속으로 한 움큼씩 집어던진다.

-그만 집어넣어라 잠도 내일을 위해선 아껴야 된다.

엉킨 껍질 사이 언뜻 언뜻 비치는 하얀 속살

몇 개의 고구마는 물속 깊이 가라앉아 아예 떠오르지 않았다.

달구어진 수증기 알맹이들이 고통처럼 튀어 올라 술렁거리는 세상 속

고구마들은 두 눈을 꼭 감은 채 데굴데굴 떨어진다.

-어머니 저 고구마들은 언제 익나요.

-그건 1시간이 될지 하루가 될지 평생 될지 아무도 모른단다.

-그럼 익지 않는 고구마도 있나요.

난 참지 못해 덜 익은 것들을 몰래 꺼내 먹기도 하고

반쯤 익은 머리가 한 쪽으로 쏠려 있는 누런 몸들을

조바심처럼 젓가락으로 쿡쿡 찔러댔다.

아궁이 속 불이 꺼지고 갈라진 벽 사이로 박자 잃은 숨소리처럼

새어나온 시커먼 연기들이 방안 가득 채울 때 연기로 채워진

아랫배에서는 배탈이 나기도 하고 내 몸 알 수 없는 상처만 늘어났다.

-어머니 저 고구마들은 언제 익나요.

 

 

 

 

빛 속으로 달려가는 검은 구두

 

 

내 낡고 검은 구두 속엔 쥐들이 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눈이 매섭게 몰아치는 날

쥐들에겐 따뜻한 털이 있는 낡은 구두가 안식처였다.

가끔 쥐들은 커다란 구두를 끌고 찬송가를 부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죽은 쥐 옆에서 부들부들 떨며 잠들었다.

저녁이 되어 어둠이 내려앉으면 가여운 구두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나를 재워줘, 나를 재워줘, 초록빛 젖은 잎사귀를 덮고 영원히 잠들고 싶어.

집 속에 숨어있던 쥐들이 일제히 찍찍거렸다.

자정이 되었을 때 난 구두를 신고 오솔길을 따라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숲 한 가운데 저수지가 있었다. 안개로 기득 찬 무의식 같았다.

난 아름다운 달빛이 물결에 내려 앉아 피동을 일으키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구두가 자꾸 저수지 가운데로 풍덩풍덩 뛰어들었다.

서둘러 구두를 벗는다.

난 자살구두란다, 너의 고통을 아주 쉽게 내가 끝내줄게.

구두는 저수지로 뛰어들었다.

허겁지겁 산에서 내려왔다. 비가 매섭게 내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초록빛 잎사귀엔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저수지는 바닥이 드러나 보일 정도로 메말라 있었다.

진흙덩이가 묻힌 초라한 구두 한 켤레가 저수지 가운데 있었다.

나를 다시 신어줘, 너를 사랑해, 난 너의 오래된 영혼이잖아.

난 울음을 터트리며 낡은 구두를 외면했다.

생일날 어머니는 아주 멋진 새 구두를 사주셨다.

아기야, 다시 시작하렴. 죽음의 향기는 사라지고 창문 틈으로 흘러온 빛이

구두 속에 고여 온몸을 따뜻하게 할 거야.

여전히 어둠이 내려앉으면 저수지 쪽에서 낡은 구두의 울음소리 들렸다.

쥐들은 여전히 새 구두 속에서 일제히 찍찍거렸다.

 

난 엄마가 사주신 새 구두를 껴안고 부들부들 떨며

죽은 쥐 옆에서 잠들었다.

 

 

 

 

달려라 치타

 

 

  잠자기 전에 시큼한 식초를 눈에 바르는 것이 나의 유일한 취미였다 나는 우울한 난쟁이 키가 커지기 위해 누군가의 꿈속을 위태롭게 드나들지 샅샅이 훑어 심장 속에서 신비롭고 낭만적인 태양을 훔친다 나는 누군가의 아름다운 어둠에 감염되기도 하네 간호사는 해독제로 그녀의 따뜻한 눈물을 혈관 속에 투여한다 나는 사랑스런 그녀에게 내 것과 같은 말하는 인형을 선물 하네 그녀의 신비스러운 코는 내려앉은 지붕처럼 위태롭네 그래서 가벼운 햇살로 그녀의 콧속을 단단히 채우네 그녀는 비밀이 많은 가식적인 모나리자네 그녀의 의식은 항상 몽롱한 꿈속이지 인형은 누군가의 꿈이 거대한 프레스기로 눌려 압축될 때 휘파람을 부네 그것은 바람의 살갗이 벗겨지는 것처럼 고통스럽네 인형의 뱃속에는 배고픈 치타가 달을 항해 달리고 있네 나뭇잎이 많이 쌓인 아침 나비의 날개소리가 들리네 나비들은 지칠 줄 모르고 물구덩이 첨벙거리는 행인의 심장 속으로 날아가네 딱딱한 죽음을 입에 물고 꽃술 속으로 후하고 불어 넣는다 꽃 속에서 부스럭 부스럭 따뜻한 음악이 흘러나오네 빛을 감은 삶의 목소리가 태어나는 소리네 나는 인형의 몸속에서 꿈 쪽으로 가는 출구를 찾는다 위가 거북이 등처럼 비대해진 인형은 정육점의 고깃덩어리처럼 나를 토해낸다 모자를 쓴 인형은 꽃으로 장식된 빙하 위에서 북극성과 저녁식사를 하고 있네 나는 어지럽게 버려진 꿈들을 정리하며 인형의 꼬리를 자른다 눈이 내리는 날 인형을 잃어버린다 인형의 꼬리만 장작불 주위에서 인디언처럼 춤을 추고 있다. 내리는 눈속에 엎지른다 그녀가 눈 내리는 세렝게티의 초원에서 치타처럼 죽음의 웅덩이를 건너뛰고 있다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세계,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