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4월호의 시(9)와 유동 꽃

by 김창집1 2024. 5. 7.

 

 

우리는 무기사형수다 임보

 

 

우리는 갇혀 있는 사형수다

담도 없는 등근 구치소

지구라는 허공에 떠 있는 유형장

울타리도 없지만

지구의 인력으로 도망칠 수 없게 묶어 놓은

완벽한 유배지에 묶여 있다

 

더러는 탈출을 꿈꾸는 자들도 있어

인공날틀을 만들어 다른 별들을 찾아가 보기도 하지만

생명의 동력인 물과 공기가 없어 되돌아와야만 한다

 

유형의 기간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갇혀 살던 인간들이

때가 되어 이 지상의 유배에서 풀려나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갇혀 있는 것이 지겨워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을 집행하여

자의로 지상을 떠나는 자들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돌아가는 곳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몇 남아 있는 동기동창생들이 모임을 갖는다는 전갈이다

아마도 동병상련의 외로움을 달래자는 뜻이리라

 

떠나기 전의 친구들 얼굴 한 번 더 볼까 하다가도

더 본들 무엇 하나 싶어 그냥 주저앉고 만다

 

 

 

 

길 위의 봄 채영조

 

 

마음이 내어 준 길은

연초록 산색의 색시함으로

아름다운 한때를 기억할 것이다

통도사 극락암 뒤꼍

툇마루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본다

파아란 하늘에

그리움들이 묻어 있다

되돌아보면 아쉬울 것도

서러울 것도 없었다

삶의 이치에 순응하며

곱게 익어 갈 뿐이었다

찔레꽃 향기가

사찰 담장 넘어 따라나선다

한 걸음 앞서가는 고운님,

뒷모습에 봄꽃이 활짝 피었다

 

아름다운 봄날이다

 

 

 

 

마네킹 김정식

 

 

몸을 단장하고 진열대에 오른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호객한다

유리막에 헝클어진

머릿결을 손빗으로 빗고

무표정한 얼굴을 반짝여 본다

총총걸음으로 쌓이는 전단지,

엉켜진 도로 위

벤츠의 경적이 푸념을 내뱉고

검은 창문을 열다가 굳게 닫는 신용카드

꼬깃꼬깃한 지폐의 눈길도 나를 외면한다

오늘도 허탕이다

내일이면 다른 방으로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

내일의 내일

다음의 내일도 허탕이면 어떡하지

임금이 줄어들지도 몰라

어쩌면, 지하 속 골방으로 감금될지도……

손때 묻은 몸을 문질러도 보고

쇼윈도에 줄 맞추어

새 못으로 갈아입어도 보고

몸뚱이를 거울에 비추어 본다

헝클어진 머리칼

코르셋에 끼인 허리

등줄기에 시침 핀을 떼고

나는 어제보다 높아진 진열대에 오른다

 

 

 

 

봄날에 - 도경회

 

 

얼었던 돌 살 터지는 봄

피리 불어

배동배동 몸살 나던 길섶

 

제비꽃이 돋았고

냉이꽃이 핀다

 

호로록 찌르찌르

고운 새가 날아와

청아한 목소리를 뽑아 댄다

 

오래되었으나

언제나 새로운 노래

 

귀에 감도는 은은한 소리는

한없이 울려

 

핏물 진 연한 살 뚫고

보안 목덜미에 놓인 어린 꽃 하나

겨우 향기를 놓아준다

 

그저 한 걸음 내딛는

네가 눈물겹다

 

 

 

 

그릇 정형무

 

 

  음문을 닮은 저곳으로 거센 불길이 흘러들고 나서 깨지기 쉬운 모양들이 생겨났다. 둥글고 모난 그릇들은 오목한 곳에 다른 것을 품어 꺼지지 않도록 지어진다. 저승으로 딸려 보낸 것들이 다시 나와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살기도 한다. 아무려나 부서지면 돌이키지 못 하는 게 섭리이고 물 불 공기 흙이나 그들을 주물러 빚은 혼조차 세상의 근원은 아니다. 이리저리 옮아가는 그릇, 고이 모서지는 그릇. 한살이 그릇들은 도무지 어미 아비를 모른다.

 

 

 

 

이방인 시편 - 장성호

   -어떤 신발

 

 

서초 고속도로변 오솔길

나무벤치에서 한 여인이

얼굴이 얽은 한 남자와 손을 맞잡고 기도한다

그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우리가 계속 함께 지낼 수 있을까요

그녀는 다정한 눈빛으로 그에게 말한다

우리는 수많은 밤 기도했어요

가슴속 희망의 노래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어요

이제 우리는 두렵지 않아요

그대가 믿기만 하면

그대가 믿는다고 입으로 말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어요

그의 힘없는 말소리가 들린다

이 불안한 삶 속에서 우리의 기도가 수포로 돌아간다면

희망은 여름 철새처럼 너무나 빨리 날아가지 않을까요

그녀는 희망찬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삶에는 두려움과 고통이 있겠지만

그대가 믿기만 하면 그대는 이를 수 있어요

나지막하지만 밝은 목소리가

희망이 가까이에 있다고 말해 줄 거예요

저기 나무벤치에서 한 여인이

오랫동안 신은 낡고 찌그러진 신발을 매만지며

기도하고 있다

 

 

                             *월간 우리4월호(통권430)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