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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계간 '제주작가' 봄호의 시(3)

by 김창집1 2024. 5. 6.

 

 

빈방 - 김원욱

 

 

오랜만에 낡은 방에 들어섭니다

방이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낯선 주인이 못마땅한지 창을 뿌옇게 호려놓습니다

켜켜이 쌓인 먼지가 번들거리고

까마득한 날 미혹의 숲에서 떠돌던 적막이 동공 속으로 턱 내려앉습니다

 

내력이야 어떻든 정을 주고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순백의 그늘에서

삼신할머니가 덥석 거친 손을 잡던 날

투명한 바이칼호 설원을 떠나 고비사막 건너온 좁은 방

광활한 초원 목동 냄새에 묻히다가

성긴 눈발 무심히 흩날리는 창가에 기대어

오늘은 무엇을 비울까, 마음 졸이던

 

아무도 보는 이 없는 빈방

 

명징한 정신이 무명의 하늘에 갇혀 있는

색계(色界)의 창 너머

시신경이 인드라망처럼 얽혀 있는 내 안을 들여다봅니다

큰 적막뿐인,

순백의 달덩이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겨울 목련 - 김성주

 

 

새가 새를 죽인 아침입니다

 

당신의 눈 속을 날아다니던 작은 새

 

눈물 한 방울이 만들어놓은 망망대해

휘날리는 눈발 속에서

한 잎의 흑갈색 돛대를 달고

당신의 종이배는 세렝게티를 향해 떠납니다

 

당신이나 나나 바보를 면할 수 없나 봅니다

 

사바나에 비가 내리고

여린 것들의 함성처럼 피어난 5월의 꽃송이도 잠시

푸르름이 유혹을 따라 찾아온 사자 하이에나 독수리

새가 새를 죽이는 세상

 

우리도 한때 햇살 밝은 섬집 아기인 시절이 있었지요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날 즈음

바닷가에 나아가 수평선 저 너머로 종이배를 띄우는

버릇이 생겼지요

 

새가 새를 죽인 아침입니다

 

우리의 종이배는 침몰을 잊은 듯합니다

 

 

 

 

먹쿠실낭 - 김순남

 

 

오죽허민 고통을 닦는 당이렌 고련수*라 헤 시카

엇다. 내음살 궂덴 말라

그 덕에 하간 충덜 돌아나게 허였져

자주색 꽃송이 자리 밑에 꼴아두민

니광 베록 얼씬 못하곡

마당에 모깃불 놓아 돈 좀 들엇시난

똘이영 아덜이영 여드름 제운 양지에

지름 자르르 고왔져게

그 시절 부치러웡 말라 내무리지도 말라

백팔염주 맹글아 액운도 쫓으곡

핸드백 숄더백 기념품으로 하늘 뱃길 놀았져

잎생이영 고장이영 껍데기영 뿔리영

버릴 것 호나 어신 당이여

 

사름 시상 고정한 때엔 신성한 당이렌

해태**가 먹쿠실 잎생이만 먹었젠 고라라

암무상 어시 좋아 허여시카

엿날 어룬덜은 돗통시 에염에 심어둠서

물질에 밭일에 죄어신 여청덜 헛구역질 지우명

눈물 콧물 밥에 칭원한 당이었주만

큰 년 족은 년 말젯 년 시집보낼 때

곱닥한 궤 한 짐 졍 보냄시민

모음이 부끄곡 코삿허였주

 

동짓돌 저냑은 그추룩 길엄신디사

눈발이 뽀드득 우영팟 깨우는 날엔

먹쿠실 노리롱한 열매는

우리 어명 환하곡 아련한 눈빛이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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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련수 : 멀구슬나무의 다른 이름.

** 해태 : 상상의 동물. 정의와 평화를 상징함.

 

 

                       *계간 제주작가2024 (통권 제8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