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8)

by 김창집1 2024. 5. 12.

 

 

요구르트의 반란

 

 

엄마의 젖가슴은 바다의 해초처럼 늘어져 살랑거렸다

엄마가 슬퍼하면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오래도록 시린 눈이 내렸고

벚꽃 같은 젖무덤이 빙하처럼 굳는다

나는 북극을 유영하는 범고래가 되어 빙하의 동굴 속에서 오래도록 잠이 들었다

시력이 안 좋은 범고래는 물방울 콘택트렌즈를 끼고 해저 깊은 곳으로 떠나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의 젖이 말라갈 때쯤 엄마는 나에게 신선한 요구르트를 주었지

입 속에서 물컹한 햇살이 알싸하게 터지는 신비스런 알약처럼, 하루에 한 개씩

얘야 이것밖에 없구나 이것을 마시면 슈퍼맨처럼 굉장한 힘을 발휘할 거야

이 세상의 모든 울음은 요구르트 냄새 나는 죽은 나뭇잎 속에서 녹아내린다

젖은 울음의 향기는 어둡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꽃잎의 영혼을 떨어뜨리며

가볍게 흔들리는 가장 깊은 숲속의 고요한 나비 날개 위에 머문다

요구르트는 비키니 입은 늘씬한 바람이었네 자꾸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눈을 돌리는 웅큼한 사내들은 입 속이 달콤했네

요구르트는 어린 나에겐 얼굴 없는 신이었네

요구르트를 마신다는 건 어둠 없는 신생아에서 착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지

키가 커가면서도 나는 아득한 엄마의 젖무덤을 잊지 못했네

관 속으로 들어가는 죽은 자의 몸에 붉은 꽃잎처럼 신선한 요구르트를 뿌리네

차가운 영혼이 부패되지 않고 어두운 바람 속에서 천천히 말라가도록

죽은 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였네

뼈가 우두둑 부서지며 죽은 자의 몸에서 백합꽃이 피어나고

혹은 심장 속으로 스며든 요구르트 성분 때문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올 수 있다는

두려움은 실아서 남은 사람들의 눈동자에 붉은 눈물로 흘러 내렸네

사랑하는 사람을 구름 속에 묻고 돌아온 저녁 아침이 되기 전에

머리를 자르고 검은 발톱을 서둘러 깎았네

엄마가 긴 머리를 자른 날에는 요구르트를 뿌려 김치찌개를 만들고

된장국을 만들고 고등어를 기름 대신에 고소한 요구르트에 튀기네

바싹 튀겨진 고등어들이 대중목욕탕 같은 뿌연 내 머리 속에서 뻐금뻐금 담배를 피우는

있을 수 없는 이 현상들을 나는 요구르트의 반란이라 하겠다

음식을 만드는 엄마의 엉덩이가 가냘픈 요구르트 병 같았네

과학자들은 현미경으로 요구르트의 성분을 분석하네

요구르트의 성분은 세상 속을 돌아다니다 지쳐서 기절한 따뜻한 햇살과

맨 처음 길가에 떨어지는 싱그러운 꽃잎의 향기였네

노을 속으로 요구르트를 뿌리고 노을은 더 짙어지네

요구르트는 부족한 내 언어 감각을 보듬는 황금빛 양장 국어사전 같았네

 

 

 

 

파스의 힘

 

 

  비 내리는 버스정류소 낯선 여인에게서 파스냄새가 났다

  그녀의 얼굴은 능숙하게 성형한 것 같았지만 깨진 유리조각이 박힌, 테이프로 어수선하게 묶여진 진열대 위의 감귤박스 같았다 그녀의 눈동자는 어두웠고 만약 그녀가 파스를 붙였다면 그녀의 파스 또한 어두울 것이다 그녀가 눈을 감으면 그녀의 눈동자에도 쓸쓸한 나무처럼 파스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파스 향기는 섬뜩하다 긴 혀를 내밀고 핏방울을 떨어뜨리며 지나가던 개들이 그녀의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그녀는 아찔할 정도로 매력적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파스란 영혼을 가꾸는 화장품과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는 깊은 몸에서 차가운 말의 단도를 꺼내어 개의 목을 후려친다 파스의 향기는 저돌적이고 은밀하다 모래 바람이 지나간 자리 홀로 피어 있는 마른 풀꽃 향기이다 나와 그녀 사이에는 사나운 폐허처럼 검은 사막이 펼쳐져 있다 젖은 울음도 섞여있다 그녀는 모래로 만든 뼈들을 썩은 근육 속에 끼워 맞춘다 파스가 떨어지지 않게 조심조심 파스의 힘은 녹슬어버린 어둠을 풀고 근육 속에 단단한 희망을 전달할 것이다 바람에 흔적 없이 사라질까 나의 손은 항상 파스의 심장에 닿아 있다

 

 

 

 

노르웨이에서 봅시다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할머니가 빨간 캐리어를 끌며 구름다리를 건너고 있다

할머닌 젤리 같은 구름 위에서 비틀즈의 음악을 들으며 거품목욕을 즐겁게 하죠

귀 기울여 보세요 할머니가 빗방울이 되어 후두둑 당신의 눈썹 위로 떨어지는 소리

들리나요 캐리어 속에서 캐비아가 부화되는 소리

할머니는 먹구름 밑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고 있는 배고픈 노숙인에게

캐비아를 나누어 준다

상어들의 귀가 캐리어 속에서 뛰쳐나온다

할머니의 배꼽에는 아직도 하얀 눈이 떨어지고 있나요

노숙인들의 귀는 아직도 아름다운가요

이 세상의 모든 우울한 귀들은 아름다운 꽃잎으로 변해 젖은 거리에

하얀 목숨을 떨어뜨릴 거예요

할머니는 바람의 심장으로 가기 위해 나뭇잎을 타고 구름을 건너

태양의 혓바닥에서 잠시 쉬고 있어요

어두운 추위에 혼자 떨지 마세요 캐리어 속으로 들어간 할머니가 어두운 밤마다

당신의 불꽃이 될 거예요

유령들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당신을 숭배할 거예요

당신의 어린 꿈속에서 말 못하는 빨간 왕관 앵무새는 잘 자라고 있나요

앵무새의 혓속에선 눈부시게 꽃이 피어나고 있나요

할머니의 입술이 가지 끝에 매달려 쓸쓸히 잠이 든다

아침햇살이 캄캄한 할머니의 몸을 통과하면

죽음으로 채워진 꿈속에서 환한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다시 살아서

돌아 올 수 있을까 할머니의 은빛 안경알에서 우울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할머니는 은행나무 잎사귀에 이슬로 동그랗게 맺혔다

캐리어 속엔 불타오르는 햇살들이 가득 차 있었다

 

빨간 왕관 앵무새 하나 빨간 캐리어를 끌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노르웨이에서 봅시다

 

 

       *강동완 시집 외로움은 광부의 삽처럼 번들거리네(시와세계, 2023)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