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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의 시조(8)

by 김창집1 2024. 5. 14.

 

 

정방폭포 지노귀

 

 

주상절리 지층처럼 켜로 쌓인 세월 앞에

울음인 듯 하소인 듯 물소리를 듣는다

씻김의 해원상생굿

그 화해의 축문을

 

시나브로 귀에 이는 그날의 아우성들

가슴속 서로의 멍울 다독이고 쓸어주며

지노귀 지노귀새남

갈매기도 목이 쉰다

 

수천수만 발자국에 못내 밟힌 돌덩이가

카메라 초점 밖에서 파도에 젖을 동안

절벽 위 소남머리*에도

촛불 하나 켜지고

 

물보라로 일어서는 저 참회의 비손 행렬

봉인 풀린 눈물들이 폭포수로 쏟아질 때

불로초 뚝 꺾은 봄이

비척대며 오고 있다

 

*제주 43당시 산남 최대의 집단 학살 터. 정방폭포 위쪽에 위치.

 

 


 

선수머셋굴* 앞에서

 

 

들불이 휩쓴 땅에 노루 일가 살고 있다

행여나 누가 올까, 귀를 쫑긋 세워 들고

풀잎에 바람만 스쳐도 소스라쳐 몸을 떨며

 

수백 년을 버터 섰던 팽나무도 쓰러진 들

집터마저 허물어진 전설 같은 마을에는

국방색 억새풀 무리 밭담 앞에 키를 잰다

 

금줄이 채워지듯 거먕 노을 덮는 어둠

수장된 소문들이 오름 위에 달로 뜨면

하도리, 종달리 바다는 시퍼렇게 명이 들고

 

그을린 뼈들 중에 반골이 있었을까

해토머리 밭을 일굴 호미 괭이 쇠스랑뿐

동굴 안 어느 구석에도 총은 뵈지 않았다

 

올레꾼도 찾지 않는 심의 가장 뒤꼍에서

굴에 갇힌 사람들을 추억하듯 헌화하듯

살그니 고개를 숙인 개망초 하안 꽃잎

 

거만한 침묵 아래 굴은 끝내 메워지고

저만은 떠나지 못해 글썽해진 노루의 눈

다랑쉬 그 봉분 앞에 술 한 잔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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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218일 하도리와 종달리 주민 11명이 희생된 다랑쉬굴의 원래 이름.

 

 


 

다랑쉬굴 일기

 

 

19481212일 흐림

 

집을 언제 떠났는지 기억이 가물거려요

아랫담 이웃들이 왜 여기 모였는지

잿빛의 서녘 하늘은 아무 말이 없네요

 

불을 피한 멧새들이 별을 좇는 이 저녁도

헤식은 재를 뒤져 구워내는 지슬 몇 알

어둠 속 까만 눈들이

허기로 반짝여요

 

19481215일 맑음

 

열한 명만 남은 굴은 한 식구가 되었어요

돼지 먹이 주러 나간 아주망과 이주방들

함께 간 아방 어명은 돌아오지 않는데

 

구석자리 웅크린 채 녹이 슨 호미 괭이

한라산 설문대할망 눈 귀 막은 겨울 지나

하진 밭담 안에도

봄볕 다시 내릴까요?

 

19481218일 흐림

 

밝은 데로 나설수록 등줄기가 서늘한 땅

궤도 잃은 별똥별이 오름 위로 떨어질 때

선잠 깬 아침을 찢는 단말마의 총소리

 

뒤를 이은 새된 외침, 다랑쉬를 울리네요

고춧대 생솔 연기 굴을 집어삼켜요

이제는 마지막이우다

잘 살암십서,

, , ,

 

 

                *임채성 시조집 메께라(고요아침, 2024)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