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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창집의 오름 이야기
아름다운 시

월간 '우리詩' 5월호의 시(1)

by 김창집1 2024. 5. 15.

 

 

능소화 김석규

 

 

능소화 넌출지게 담장을 타고 넘어와

호젓하게 들어앉은 골목의 맨 안쪽

으스름달밤엔 난봉꾼도 기웃대다 갔을

대문은 녹슨 고리를 물고 굳게 닫쳐 있고

종종대는 가마꾼 발자국 소리도 끊어진 지 오래

휘영청 달빛 꺾어지는 추야장

가끔은 오동잎에서도 가야금 소리 묻어나던

파다한 소문 세간을 드날렸던 젊은 한때

이젠 비녀 머리 고운 퇴기가 산다 했다

 

 


 

그곳에 가면 - 목경희

 

 

투명한 하늘 아래 바람이 흐르고

푸른 바다 사이사이 외로운 사람처럼

비양도, 마라도 섬들이 듬성듬성 있다

검게 타들어 가다 멈춘

현무암 돌멩이 속에 잠든 전설

조각난 구멍마다 사연을 뿜어낸다

해녀의 거친 숨비소리 시절이 변해도

여전히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데

무심한 구름은 유심하게 세월을 이어 간다

하늘의 별이 내려와 바다의 별이 된

진실의 불가사리가 살고 있는 제주도

그곳에 가면 바람이 만들고 눈물로 만든

돌하르방 같은 사람이 살아가고

계절의 사계는 끝없이 돌고 돌아오는데

햇무리구름 떠 있는 산방산 아래

어두운 장막을 걷어 내고 찬란한 봄의 서막

병아리색 유채꽃이 삐약거리며 봄을 몰고 달려온다

 

 


 

이번 생은 동백입니다* - 박광영

 

 

내일이면 허물어질 나무입니다

 

속이 쓰려 쓰러지지요

빈속과 빈손엔 아무 것이

들어 있기도 하고 안 들려 있기도 합니다

 

알전구 꺼진 심연을 들여다볼 수 없지요

세월이라 쓰면 캄캄해집니다

 

검은 소음을 몰고 오는 악동이 있어요

약오른 흰 소는 켜켜이

드럼통을 쌓네요 어젯밤부터 적재함에는

화목火木들이 앉아 울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걸린 낮달은

꼬리를 끊어야 날 수 있겠지요

 

한 데서 피던 핏빛들이 나방처럼 달려듭니다

 

별다른 생이 있습니까

 

어제는 해 뜨고

밥 먹고 또 먹고, 해 지면 눈알만

말똥말똥한 채,

이륜차의 키를 돌리지요

 

곧 허물어질 나무일 따름이지요

 

---

* 남길순, 이번 생은 기린입니다차용.

 

 


 

노을을 만나다 성숙옥

 

 

꽃무릇 같이 피어난 서쪽 하늘

수채물감 같은 주황은 검푸른 초록을 반사하며

사물을 여리게 그려 낸다

끝을 알리는 듯 하루를 마감하는 이마에서

붉어지는 기억

수없이 마주한 노을이지만

만날 때마다 그 유한함에 쓸쓸하다

반나절도 머물지 못하는 저 색을 누가 펼치는가

낮과 밤이 섞이는 그림자 속

나무의 품에 기대며 내려앉는 새들이 있다

사는 이유를 모르는 생명의 직진 사이

머뭇거리지만 결국 사라지고 말 것들 사이

저들과 같은 내가

그 호흡에서 위안 받는다

누가 내 눈동자에 여러 그림자를 채우는가

어둠에 스미는 색은

저녁을 덮으며 아득해지고

문득 나를 따르는 벚나무가 한숨 같은 바람을 토하는데

꽃의 출구 같은 하늘이 아슴아슴 비릿한 냄새를 풍긴다

 

 

                 * 월간 우리5월호(통권 431)에서